입력 : 2016.12.20 02:07

크리스마스가 다가오면 가슴 한 편은 아직도 설레고, 또 한 편은 아직도 아릿하다. 종교를 떠나 ‘크리스마스’ 앞에 ‘메리’를 꼭 붙이는 많은 이들처럼, 그 단어처럼 나도 즐거워진다. 베란다의 화초에라도 반짝이는 꼬마전구를 두르고, 맛있는 음식 준비도 궁리하게 된다. 그러면서도 크리스마스 날 돌아가신 아버지 생각에 가슴이 아려지는 것이다. 자수성가하신 당신은 그저 엄격하시고, 잔정이라곤 없이 일밖에 모르셨던 분이다. 어느새 5년이 흘렀지만 여전히 아버지가 그립다.

우리 형제들의 다음 세대들은 썩 그래 보이지 않는다. 나의 아들과 딸을 비롯한 손자 손녀들이 20대에서 30대로 한창 자기 갈 길이 바쁜 때라고는 해도 할아버지의 존재를 벌써 잊어가는 건 아닌지 서운하다. 할아버지와의 추억이 별로 없는데다, 할아버지에 대한 이야기를 자주 해주지 않은 부모로서 나부터의 잘못이다. 하기야 부모라도 오래도록 추모하면 다행이다 싶은 요즘에 할아버지를, 나아가 증조할아버지까지 자랑스럽게 기리기를 바란다면 시대착오적인 것일까. 그런 손자나 증손자를 보면 그 가족에 대한 부러움을 감추기 어렵다.

최근 만난 네드 포니씨도 그중 한 사람이다. 보다 더 끈끈한 가족관계를 자랑하는 한국인도 아닌 미국인이 손자로서 할아버지에 대한 자랑스런 추억을 얘기할 때‘이 사람은 돈으로는 안 되는 위대한 유산을 받았구나’하는 생각이 들었다. 그의 아들인 20대의 증손자 벤 포니씨도, 이들 포니가와 인연이 특별한 현봉학씨의 가족들도 마찬가지다. 지난해 크리스마스에 처음 만났을 때 건네받은 명함들에는 이름 아래 현봉학씨의 딸, 또는 사위, 손자라고 적혀있었다. 누구의 자손임을 감추고 싶은 사람도 많은 세상에서 어떤 타이틀보다 자랑스럽기 때문이다.

며칠 전 네드 포니씨가 현봉학씨의 동상 제막식을 앞두고 썼다며‘한 명의 헌신이 새 생명 100만 명이란 축복으로 결실’이란 제목의 글을 이메일로 보내왔다. 읽어보며 부모로서, 또 자식으로서 정말 잘 살아야겠구나 생각한다. 네드 포니씨의 할아버지 에드워드 H. 포니씨나 현봉학씨처럼 꼭 대단한 업적이 아니더라도 생명과 희망, 사랑을 남기려 노력해야겠구나 생각한다. 어떤 가치보다 오래가고, 무엇보다 자신부터 행복하게 사는 길이 아닐까. 당시 그들도 업적을 남기기위해서가 아니라 바로 그 가치를 위해 최선을 다했음이 네드 포니씨의 글안에 담겨있다.

지난 19일 제막된 현봉학씨 동상 앞에 모여선 현씨와 포니씨의 후손들.

네드 포니씨의 글

‘한 명의 헌신이 새 생명 100만 명이란 축복으로 결실’

크리스마스는 매년 다가오지만, 나에게는 늘 특별하다. 내가 태어나기 훨씬 전인 1950년 크리스마스 이브 저녁. 한 번도 가본 적 없는 흥남 부두를 마치 눈으로 보듯 생생하게 그릴 수 있다. 섭씨 영하 20도를 오르내리는 맹추위 속에서 공산군의 공세에 밀려 퇴각하던 유엔군은 배를 이용해 남쪽으로 철수할 준비를 서두르고 있었다. 하지만 오갈 데 없던 수만 명의 피난민들은 다가오는 죽음을 기다리는 것 외에는 달리 할 수 있는 게 없었다.

미군 제10군단의 민사부 고문으로 근무 중이던 28세 청년 현봉학. 함경도 함흥 출신인 현봉학은 세브란스의대를 졸업한 뒤 미국에 유학해 임상병리학 학위를 받은 의사였다. 그에게 피난민들은 남이 아니었다. 친구이자, 친척이었고, 형님이자 동생이고, 조카들이었다. 그는 미군을 설득하기 시작했다. “피난민을 놔두고 철수하면, 저들은 적군의 총칼에 목숨을 잃는다. 제발 그들을 구해 달라.” 그의 요청은 너무나도 간절했다.

전쟁에도 매뉴얼이 있다. 군인들을 싸울 때와 퇴각할 때 그 규정에 따른다. 군인들을 싣는 배에 피난민을 태울 수 없다. 현봉학은 그 규정을 어기는 한이 있더라도 피난민들을 배에 태워달라고 간청했다. 그의 노력은 2주 이상 계속됐다. 지성(至誠)이면 감천(感天)이라는 말은 이럴 때를 위해 만들어졌을 것이다. 미 해군 제임스 도일 중장, 미 해병대 제10군단 사령관 네드 아몬드 장군, 미 해병대의 대피 후송을 담당했던 에드워드 H. 포니 대령은 현봉학의 요청을 받아들여 피난민을 태우기로 결정한다. 배에 실려 있던 무기와 트럭, 탱크를 바다에 버리고 그 자리에 피난민을 태우기도 했다.

1950년 12월24일 크리스마스 이브, 군인과 피난민 수천 명을 태운 마지막 배가 흥남 부두를 떠나 남쪽으로 출항했다. 그것은 생명을 향한 길이었고, 사람답게 사는 세상으로 가는 길이었다. 혹독한 전쟁, 추위와 굶주림에 시달리며, 오로지 절망밖에 없던 피난민들에게 그 뱃길은 한 줄기 희망이었다. 현봉학의 헌신으로 생명을 구한 피난민이 모두 9만2000여 명에 이른다. 이들은 대부분 한국에서 정착했지만 일부는 미국이나 캐나다 등 전 세계로 퍼져나가 살고 있다. 66년이 지난 지금, 그들의 후손은 줄잡아 100만 명에 이를 것으로 추정된다.

20대 젊은 청년 현봉학의 수고와 헌신, 그의 정성에 공감한 유엔군 지휘관들의 결단이 이 땅에 100만 명의 새 생명 탄생이란 축복으로 결실을 맺은 것이다. 현봉학의 이야기는 ‘한국의 쉰들러, 현봉학’이란 다큐멘타리로 제작돼 많은 사람들에게 감동을 주었고, 최근 ‘국제시장’이란 영화 앞부분에도 나와 관람객들의 심금을 울렸다.

현봉학의 업적을 기리는 동상 제막식이 오는 12월19일 오후 3시 서울역 세브란스빌딩에서 열린다. 이 동상은 피난민의 생명을 구하는데 헌신한 현봉학의 숭고한 뜻을 기리는 기념비이자, 동시에 억압과 인간성 말살을 피해 탈출했던 피난민 9만2000여 명에게 바치는 헌사다. 이 동상은 한 사람의 노력이 얼마나 큰 업적을 낳는 지 보여주는 뜻 깊은 상징물이 될 것이다.

미군의 흥남 철수작전 책임자였던 에드워드 H. 포니 대령은 나의 할아버지다. 내 몸속에는 피난민의 생명을 한 사람이라도 더 구하려고 의기투합했던 현봉학과 할아버지의 정신이 흐르고 있다는 생각을 종종 한다. 크리스마스가 다가올 때마다 위대한 인물들이 떠올라 가슴이 두근거린다. 올해는 특별한 크리스마스를 맞을 것 같다.

*네드 포니씨의 글 동상 제막식이 있기 전에 작성되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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