집 사랴, 병원 가랴… 퇴직연금 탄 20만명, 99%가 일시불

"남편이 회사에서 퇴직연금에 가입했다는 얘기를 들은 기억이 나서 확인해보니 3000만원 넘는 돈이 있는 거예요. 이 정도면 대출 부담도 크게 덜겠다 싶어 이번에 부천에 집 살 때 중도 인출해 썼어요."

전세 난민 생활을 하던 주부 이모(37)씨네는 지난여름 큰맘 먹고 집을 마련하면서 퇴직연금을 헐어 썼다. 은행 대출을 더 받을 수도 있었지만, 당장 눈앞에 목돈이 있고 무주택자가 집을 살 때 정당한 중도 인출 사유가 된다는 얘기에 노후 자금을 당겨 썼다.

지난해 이씨처럼 퇴직연금을 중도 인출한 가입자가 3만1399명, 인출 금액은 1조674억원에 달하는 것으로 집계됐다. 19일 퇴직연금 통계를 처음 산출해 발표한 통계청은 "연령대별로 보면 30대가 중도 인출자의 절반 가까이 차지한다"고 밝혔다.

국민연금만으로는 노후 대비가 불가능한 시대, 근로소득자의 은퇴 후 노후 생활 안전판 역할을 맡으면서 2005년 도입돼 작년 말 125조원 규모로 불어난 퇴직연금이 당초 취지와는 다른 방향으로 활용되고 있다는 우려가 나오고 있다. 적지 않은 가입자들이 퇴직연금을 당장의 생활비로 손쉽게 변용해 쓰면서 본래 목적인 노후 대비는 뒷전으로 미뤄놓고 있기 때문이다.

◇급전 수요에 무너지는 노후 자금

통계청의 지난해 기준 퇴직연금 통계를 보면 퇴직연금 중도 인출자 중 절반인 50.3%가 집 사는 데 이 돈을 썼고, 26.5%는 본인 또는 가족이 아파서 6개월 이상 장기 요양이 필요하다는 이유를 댔다. 자녀 대학 등록금이나 혼례비, 장례비 등이 필요해서 퇴직연금을 헐어 쓴 사람(10.5%), 개인 회생 절차 개시(10.2%), 주거목적·임차보증금(2.2%), 파산 선고 등(0.3%) 사연도 가지가지였다. 1인당 평균 3400여만원을 빼갔다. 개인형 퇴직연금(IRP)을 중도에 찾아간 사람의 91.4%는 대학등록금·혼례비·장례비에 쓰기 위해 돈을 뺀 것으로 집계됐다.

김경록 미래에셋은퇴연구소장은 "특히 저소득 계층을 중심으로 지금 당장 먹고살기 어려운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퇴직연금에 손을 대는 것으로 보인다"고 말했다.

퇴직연금을 말 그대로 연금처럼 정기적으로 나눠 받는 사람도 지난해 전체 수급자의 1.5%(3035명)에 불과했다. 나머지 98.5%(20만2261명)가 예전 퇴직금 타듯 일시금으로 연금을 받아갔다. 퇴직금을 연금으로 나눠 받으면 일시금 때 내는 세금보다 30%가량 낮은 세율을 적용받을 수 있지만, 역시 목돈 수요가 많다는 방증이다.

유지송 신한금융투자 연금기획부 팀장은 "연금이 필요 없는 자산가들일수록 절세를 위해 연금 방식으로 퇴직연금을 받길 원하고, 노후 대비가 안 돼 있는 사람들일수록 일시금 방식을 택한다는 게 문제"라고 지적했다. 6개월 이상 요양이 필요하다는 진단서 한 장이면 퇴직연금을 중도에 받아갈 수 있는 제도적 허점도 제기됐다. 퇴직연금을 운용하는 금융기관에서 해당 진단서의 진위를 가릴 방법은 없다.

◇음식·숙박업 종사자는 퇴직연금 가입률 6.6%에 그쳐

퇴직연금 가입자들이 이 돈을 쉽게 허무는 데는 운용 수익률이 기대에 한참 못 미치는 것도 원인 중 하나로 지목된다. 자본시장연구원에 따르면 DB형(확정급여형) 퇴직연금의 원리금 보장 상품 수익률의 경우 매년 꾸준히 떨어지고 있다. 2006년 1.2%이던 연평균 수익률이 2015년엔 0.69%로 떨어졌다. 수수료를 감안할 때 노후 자금이 불어나기는커녕 근근이 현상만 유지하는 정도에 그치는 상품이 많다는 얘기다.

퇴직연금은 근속 기간 1년 이상인 임금 근로자를 고용한 모든 사업장은 업종·규모에 관계없이 도입 대상이다. 전국 111만개 사업장 중 27.2%가 도입하고 있는데, 업종별로 들여다보면 가입률이 천차만별이다. 금융상품에 대한 이해도가 높고, 계열 금융회사의 연금 자산을 불려주려는 목적으로 특히 가입을 독려하는 금융·보험업이 60.3%로 가입률이 가장 높았고, 제조업도 37.3%로 전체 평균보다 높았다. 그러나 영세 사업장이 많은 숙박·음식점 업종은 가입률이 6.6%에 그쳤고, 농림어업 업종도 13.8%로 저조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