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0년간 1000여 권… 책이 곧 내 삶이요"

"평생 책 만드는 일에 종사한 사람으로서 좋은 책에 얽힌 이야기가 후배들과 국민에게 도움이 될까 싶어 털어놓았습니다."

정해렴(77) 현대실학사 대표는 '책이 삶이 된 사람'이다. 출판 인생을 담은 '편집·교정 반세기'(도서출판 한울)를 출간한 그는 신구문화사·을유문화사·창작과비평사 등 굵직한 출판사에서 1000권이 넘는 책을 만들었다. 퇴직 후에는 1인 출판사를 세워 우리 고전을 직접 번역해서 펴내고 있다.

경기도 파주 출신인 정씨는 성균관대 국문과를 졸업하고 1964년 외삼촌(고 이응백 서울대 사대 교수) 소개로 교학도서에 입사하면서 출판계에 발을 들여놓았다. 교과서를 만들던 이곳에서 출판 기초를 익힌 정씨는 이듬해 문학·인문 출판사로 이름을 날리던 신구문화사로 옮겨 '현대한국문학전집' '가람문선' '한국인명대사전' '가와바타 야스나리 전집' '한국현대사' '대똘스또이전집' 등을 담당했다. 1971년 당시 최고 출판사였던 을유문화사에도 잠시 몸담았던 정씨는 신구문화사에 재입사해서 '한용운전집' '이무영전집'과 신구문고를 펴냈다.

출판계의 유명인사가 된 것은 1976년 창작과비평사에 편집부장으로 둥지를 틀면서였다. 그는 이곳에서 1996년 말 퇴임할 때까지 20년간 재직하며 '역주 목민심서' '채만식전집' '소설 동의보감' 등 베스트셀러를 만들었다. 1979년 10·26 사태 이후 백낙청·염무웅·김윤수씨 등 회사를 운영하던 해직 교수들이 대학으로 돌아가는 바람에 3년 남짓 대표를 맡기도 했다.

'정해렴'이란 이름이 여느 출판인과 다르게 각인된 것은 그가 해온 정본화 작업 때문이다. "1970년대 초 한용운전집을 만들 때 수집한 만해의 글을 처음 발표됐던 것과 대조해보니 오·탈자는 물론 상당한 분량이 빠져 있었어요. 우선 텍스트부터 바로잡아야겠다고 생각했지요."

그는 한국 근대소설 중 최고 걸작으로 꼽히는 홍명희의 '임꺽정'을 비롯해서 '만세전' '삼대'(염상섭) '태평천하'(채만식) '황혼'(한설야) '인간문제'(강경애) 등을 원문과 일일이 대조하여 정본을 만들었다. 이런 정본화 작업에 큰 도움이 된 것은 조선일보였다. 정씨는 "조선일보는 한국근대문화사에 빛나는 글들이 발표된 무대였다"며 "아마도 내가 조선일보 자료실을 가장 많이 이용한 사람일 것"이라고 말했다.

정씨의 출판 인생은 퇴임 후 운영하는 현대실학사를 통해 더욱 빛나고 있다. 집안의 먼 어른이기도 한 정약용의 주요 저술 18권을 우리말로 옮기고 한용운·신채호·문일평·홍기문·안확·김태준 등 일제시대 사상가·학자들의 논설을 편역하는 등 36권을 출간했다. 팔순이 눈앞인 그의 책상에는 지금도 간행을 기다리는 원고가 가득하다. 우리 국한문 고전소설 83편을 번역·주해한 200자 원고지 3만장 분량과 홍명희의 대표 글을 모은 '벽초문선(文選)', 조선시대 홍문관 벼슬을 한 집안 선조들의 행적을 기록한 '압해정씨 9세옥당(玉堂)'이다. 정해렴씨는 "지난 20년은 우리 문화유산을 정리하여 후대에 물려주어야겠다는 일념으로 달려왔다"고 했다.

정씨의 '편집·교정 반세기'는 한국출판연구소가 수여하는 한국출판평론상 대상 수상작으로 선정됐다. 시상식은 23일 서울 마포구 신수동 한국출판콘텐츠센터에서 열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