입력 : 2016.12.26 16:57

카메라만 하나 지니고 가볍게 떠나고 싶었던 여행이었다. 늘 그러하듯 나는 캐리어보다 배낭을 선호한다. 배낭을 메면 의상도 가벼워져서 부담이 없고 편안해 어디든 자유롭게 떠날 수 있기 때문이다.

오후 4시경 구마모토 관광안내소에 도착했다. 천수각이 보이는 성 부근에 도착하자 해가 서쪽으로 기울기 시작하고 있었다. 회색의 어둠이 조금씩 다가오는 느낌이었고 천수각 위로 보이는 기와 모습이 지난 9월과는 달라지지 않았다. 해자를 둘러싼 성벽의 무너진 모습도, 큰 나무뿌리가 그대로 드러난 채 스러진 고목의 모습도 그대로이다. 이곳저곳 보수공사를 진행하는 모습만 9월보다 조금 더 분주해 보였다. 무너진 성벽의 모습이 쓸쓸한 그림자를 드리우기 시작한다. 나는 서둘러 몇 장의 사진을 찍었다.

구마모토성이 축성된 당시인 17세기 초는 전국시대를 거친 후 토요토미 히데요시의 시대로 이 시대는 성의 건축이 매우 발달한 시대였다. 성곽도 영국(領國)을 합리적이고 효율적으로 통치하기 위한 곳에 축조되었다. 구마모토성은 평지에 높게 건설되어 군사시설과 다이묘의 주거를 겸한 공간으로 권력을 과시하는 조형물이기도 하였다. 지진으로 출입이 금지된 성곽의 안쪽에는 여러 용도의 건축물과 방어시설이 있으며 깊이 파인 성곽의 아래쪽에는 물을 가둔 해자(垓字)가 있어 적의 접근을 방어할 수 있는 구조로 축조되어 있다. 성곽의 높이도 웅장하여 성의 중심부에 있는 혼마루(本丸)에는 6층의 천수각(天守閣)과 4층의 소천수각이 있다.

천수각은 일본이 지닌 독특한 건축양식으로 건물 내부와 외부 기둥에 금박이나 옻칠 또는 붉은색을 칠하고 벽면에 화려한 그림을 그려서 아름다운 장식을 하는데 구마모토성의 천수각은 이들이 자랑하는 천수각의 하나였으며 그 천수각의 지붕이 지난번 지진으로 기와가 흐트러지고 깨어진 채 그대로 보수를 기다리고 있었다. 임진왜란의 선봉대장이었던 가토 기요마사의 성인 구마모토성 천수각의 흐트러진 지붕 위로 저녁 해가 모습을 감추기 시작한다.

오래된 역사 속의 장소에서 넘어가는 해를 바라보면서 지진으로 흐트러진 기와의 모습을 찍기 위하여 두 달 만에 다시 구마모토 성을 찾았다. 실수로 스마트폰에서 다 날려버린 성의 사진이 아까워 다시 찾아간 나의 마음을 돌아본다.

역사는 어떤 처참한 모습을 지니고 있어도 결코 왜곡되거나 잊으면 아니 된다던 어느 역사학자의 말을 생각한다. 구마모토성이 가토 기요마사의 성이라는 단순한 역사의 장소로서가 아니고 화려하고 아름다운 천수각의 모습이 지진으로 흐트러졌던 그 사진을 나는 오래 간직하고 싶었다. 인간이 이루어 놓은 어떤 조형물도 자연의 위대함에는 매우 힘없는 존재가 되어간다는 사실의 확인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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