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인 2500년 경제생활, 이론 아니라 史實로 설명"

"이론이나 도식에 의한 설명이 아니라 역사적 사실의 인과(因果) 연쇄로 한국인의 경제생활이 걸어온 길을 정리했다. 또 이를 바탕으로 오늘날 한국형 시장경제가 지니게 된 역사적 특성을 밝혀보려고 했다."

이영훈(65) 서울대 경제학부 교수가 내년 2월 정년 퇴임을 앞두고 한반도에 문명이 시작된 시기부터 21세기 초까지를 다룬 '한국경제사'(전 2권·일조각)를 펴냈다. 전체 1380쪽에 이르는 방대한 저서는 한국 경제사를 제1 시대(기원전 3세기~기원후 7세기), 제2 시대(8~14세기), 제3 시대(15~19세기), 제4 시대(20~21세기)로 구분하여 설명한다.

본격적인 서술에 앞서 이영훈 교수는 마르크스가 주장한 '세계사의 일원적 법칙'을 한국 경제사에도 적용하려고 했던 선배 학자들을 비판한다. 특히 1960년대 남·북한을 풍미했던 '자본주의 맹아론', 즉 18~19세기가 봉건사회 해체기이며 그 안에서 자본주의 맹아(萌芽)가 발생했다는 주장은 실증이 빈약해서 국제학계의 인정을 받지 못했다고 지적한다. 이 교수는 "한국의 역사적 사회과학은 사실에 기초하지 않았기 때문에 현실로부터 유리돼 설득력이 없다"고 말했다.

이영훈 교수가 시대 구분의 지표로 삼는 것은 인간의 사회적 존재 형태이다. 생산력의 발전에 따라 사회적 단위가 작아지는 변화를 추적했다. 한반도의 사람들은 청동기시대에 공동 취사를 하다가 철기 보급으로 농업 생산력이 증가하면서 개별 주거지에 부뚜막이 설치됐고 가족이 소비생활의 단위로 자립했다. 제1 시대의 개막이다. 고구려와 신라는 이런 가족을 '연(烟)'이라고 불렀다. 하지만 생산과 수취의 단위는 약 50개의 연으로 구성된 취락이었다. 제2 시대는 농업 생산력이 더욱 발전하여 취락 내에서 여러 가족의 복합체인 '정(丁)'이 생산과 수취 단위로 부상했다.

제3 시대인 15세기 중반에 이르러 정(丁)이 해체되고 가족과 그에 예속된 노비로 구성된 '호(戶)'가 성립했다. 17세기 후반이 되면 노비가 자립하면서 소규모 가족이 국가의 기본 단위로 되는 '소농(小農) 사회'가 만들어졌다. 제4 시대가 되면 개인이 등장한다. 하지만 한국에서 개인은 서구와 달리 가부장적 질서와 친족 집단의 결속이 약화되지 않았다. 유교적 전통이 근대에 의해 재편성되는 '복선(複線)의 전환' '유교적 근대화'가 한국 근대화의 특징이다.

1963년부터 1997년까지 이어진 고도성장은 정부가 자원 배분을 주도하면서 경쟁력 있는 대기업을 육성하고 그 효과가 중소기업 성장을 유도하는 적하식(滴下式) 개발이었다. 하지만 외환 위기 이후 감속 성장기에 이르자 국가주의는 각종 규제를 양산하는 역사의 굴레로 변했다. 국가가 경제활동에 강한 영향을 미친 오랜 역사는 한국 경제를 '국가주의 시장경제'로 만든 것이다.

제4 시대를 다루는 제2권의 부제는 '근대의 이식과 전통의 탈바꿈'이다. '이식'이란 용어는 서구에서 발원된 근대 문명이 일본과 미국에 의해 한반도에 전파됐다는 이영훈 교수의 지론이 담겨 있다. "근대의 '수용'이라고 할 수는 없느냐"고 묻자 이 교수는 "애국계몽운동기에 우리 근대 문명 세력의 활동이 있었지만 나라를 빼앗겼고 그 이후 근대가 본격 이식됐다"고 답했다.

이런 인식은 흔히 '식민지근대화론'이라 불리며 일제 통치를 미화한다는 비판을 받는다. 하지만 이영훈 교수는 "식민지적 근대화는 파행적으로 진행됐고 나라를 되찾은 후에는 권위주의적 근대화가 이어지면서 '근대의 결여'를 초래해 지금 대한민국은 어떤 면에선 18~19세기 조선 사회와 비슷하게 됐다"고 설명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