직장인 희로애락, 일회용 종이컵에 담다

종이컵 함부로 차지 마라. 그러나 방금까지 자신의 체온을 건네던 종이컵은 사람의 손을 떠나 어떻게 되는가. "종이컵이 그냥 저 같았어요. 버려진 종이컵이 길바닥에 앉아 있는 회사원처럼 보이기도 했죠. 자존감이 바닥이던 시절이라 더 그랬는지 모르겠네요."

일회용 용기(容器)에 불과하던 종이컵이 용기를 냈다. 이른바 '컵툰(Cup+Cartoon)'. 일러스트레이터 김수민(35)씨는 종이컵을 캔버스 삼아 직장인의 희로애락을 그려넣는다. SNS상에서 이미 뜨거운 김씨는 최근 종이컵 작품을 모은 책 '공감 한 컵 하실래요?'도 출간했다. "컵툰은 스트레스가 준 선물"이었다. 2007년, 대학 졸업 후 굴지의 전자회사에 취직했다. 남들 다 부러워하는 대기업이었지만, 그는 매일 퇴사를 꿈꿨다.

"영업직이었는데, 거의 꼬박 밤 11시 넘어 퇴근했어요. 주말에도 하루는 출근해야 했고요. 일이 재미없으니 괴로웠죠." 더 괴로웠던 건 미래였다. "주변에 행복해 보이는 사람이 거의 없었어요. 월급은 그저 통장을 스쳐가는 것이고. 그게 내 미래일 거라 생각하니 끔찍해졌죠." 그러다 영화 한 편을 보게 된다. 할리우드 영화 '원티드'였다. "주인공이 마지막에 관객을 향해 딱 한마디 던져요. '대체 네놈이 요새 한 게 뭐야?'" 그는 다음 날 사표를 던졌다.

하고 싶은 걸 하자는 마음뿐이었다. 어려서부터 만화가가 꿈이었다. 서울 신촌에 작은 셋방을 얻어 살면서, 그림 학원에 다녔다. 종이박스부터 돌멩이나 도시락통에 이르기까지 손에 잡히는 모든 물건 위에다 그림을 그렸다. 모두 불만족. 잠과 짜증을 쫓으려 하루에도 몇 번씩 커피를 마셨다. 그러다 책상에 쌓아둔 수북한 종이컵을 보게 됐다. "유레카!" 2012년이었다.

회식에서 만취한 직장인을 그린 종이컵을 실제 고깃집에 갖다 놓고 사진을 찍는다거나, 그림을 넣은 종이컵을 구기고 찢고 뚫어가며 미생(未生)의 일상을 그려낸다. 생활이 담기다 보니 희로애락 중 자연히 '로(怒)'와 '애(哀)'가 대부분. "아무래도 밝은 내용은 아닙니다만, 구겨진 마음을 최대한 펴보려는 노력은 계속하고 있어요." 컵툰을 그리게 되면서, 번화가 주변을 배회하는 버릇이 생겼다. "종이컵이 어디에 어떻게 버려지는지, 쓰러져 있는지 밟혀 찌그러져 있는지 관찰했죠."

그림을 SNS에 올리자, 네티즌은 곧장 반응했다. 이듬해 종로의 작은 갤러리에서 개인전도 열었다. 소문을 타고 중국·일본·멕시코 등에도 소개됐다. 지난해 7월쯤 카카오에서 연재를 제안했고, 채널CGV 등 방송사와 잡지, 공공기관에서도 작품을 의뢰했다. 최근엔 홍콩에서 열린 전시 'Garden of the Artisans'에 초청받기도 했다. "내 얘기를 그렸는데 사람들이 본인 얘기라며 공감해주는 게 신기하다"고 했다.

자발적으로 넥타이를 풀렀으나, 그를 일으켜 세운 건 넥타이 부대. 프로필에도 '넥타이를 맨 직장인을 그릴 때 가장 행복한 사람'이라 적어놨다. "저는 싫어서 나왔지만 그곳이 얼마나 치열한 곳인지 알고 있고, 그분들을 끝까지 응원하고 싶어요." 네 명이 공동으로 쓰는 좁은 작업실은 드라마 '미생' 촬영지였던 구(舊)대우빌딩, 현 서울스퀘어 근처다. 그곳을 바라보며 다짐한다. "저 안의 사람들처럼 치열하게 살아야겠다는 생각이에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