담백한 詩로 그려진 한국적 회화

류경채(1920~1995)는 '잊힌' 화가다. 김환기, 유영국과 동시대에 활약했지만 그를 기억하는 대중은 많지 않다. '스타'가 되는 건 그의 체질이 아니기도 했다. 별명이 '선비'였다. "내 그림은 살 사람도 없지만, 팔 생각은 더더구나 없다. 그림 일로 안색을 바꾸는 일도 싫고, 돈 받으려고 머리를 조아리는 일은 죽기보다 더 싫다"는 말이 아직도 화가를 추억하는 이들 사이 회자된다.

한국 미술사에 '서정주의(抒情主義) 추상'이란 굵직한 자취를 남긴 류경채의 전시가 열린다. 서울 사간동 현대화랑에서 5일부터 한 달간 열리는 '류경채의 추상회화 1960-1995'다. 1990년 이후 27년 만에 열리는 전시다.

류경채는 왕십리 야산을 그린 '폐림지 근방'으로 제1회 대한민국 미술전람회(국전)에서 대통령상을 받으며 화단에 나왔다. 선배 김환기, 유영국과 더불어 뛰어난 추상화가로 주목받았지만 교단에서 가르치는 일도 화업 못지않게 열심을 기울인 그는 이들과 전혀 다른 그림을 선보였다. 색감부터 달랐다. 김환기 하면 '푸른색', 유영국 하면 '붉은색'이 떠오르지만 류경채는 담백한 중간색을 사랑했다.

1960년대서부터 작고하기 전까지의 30여 점을 선보이는 이번 전시에서도 특유의 소박하고 온유하며 담백한 한국적 색채를 만끽할 수 있다. 1960~1970년대 작품을 시작으로 텅 빈 여백 그 자체로 치유의 힘을 느끼게 하는 '나무아미타불' '비원(悲願)'에 이르기까지 자연과 전통, 일상에서 얻은 영감을 서정적으로 풀어낸 작품들이 눈길을 끈다. 김희경 국민대 교수는 "작가는 삶에 대한 기억을 형상화하여 '볼 수 있는 시(詩)'로 기록하고 싶었던 것"이라고 평했다. 화가도 생전에 "나는 그림을 빛으로 형상화한 시이자 노래라고 생각한다"고 말한 바 있다. 둘째 며느리 정수현씨는 "아버님은 작품은 상품이 되면 안 된다라는 신념 아래 개인전을 딱 두 번 열었다"고 했다. 실제로 1년에 7~8작품밖에 그리지 않은 류 화백은 "다 드러내는 게 미학이 아니다. 가리고 가렸을 때 보이는 게 미(美)고 아름다움"이라고 했다. 시간이 흐르면서 색상과 형상이 집약되고 단출해진 이유다. (02)2287-359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