학원 말아먹은 경험이 보약될 줄이야…

재계 2위였던 대우그룹을 비롯해 30대 그룹 가운데 16곳을 공중 분해시킨 IMF '쓰나미'는 그전까지 '취업 보증수표'로 통했던 서울대도 집어삼켰다. 1997년 가을 대기업 공채가 줄줄이 취소되면서 많은 서울대 졸업생이 취업에 실패했다. 1998년 2월 서울대 종교학과를 졸업한 성진경(44)씨도 백수로 사회에 내던져졌다. 생존 위기에 내몰린 기업들이 비용 절감을 위해 이미 합격을 통보했던 신입 사원들의 채용을 백지화하던 시절이었다.

성씨는 '어떻게든 돈벌이는 해야겠다'는 절박함에 학원 사업에 뛰어들었다. '나라가 망해도 부모들은 자식 교육을 시킬 것'이라고 생각했다. 친구 두 명과 함께 1000만원을 대출받아 경기 성남시에 있는 수강생 50여명 규모 학원을 인수했다. 하지만 사교육 시장도 IMF 한파를 피해갈 순 없었다. 학원 문을 연 지 1년도 안 돼 학생 수가 반 토막이 났다. 월세와 강사 월급 대기도 모자라 성씨는 돈 한 푼 못 벌어봤다. 결국 1년 만에 학원 문을 닫았다. 성씨는 빚만 남은 실업자가 됐다.

반전(反轉)은 이 실패 덕분에 찾아왔다. 1999년 벤처 열풍으로 증권시장이 들썩이자 증권사들이 소수 인원 채용 공고를 냈다. 증권의 '증'자도 몰랐던 성씨도 여기저기 원서를 냈다. 빚밖에 남은 게 없는 줄 알았던 학원 운영 경험이 뜻밖에 도움이 됐다. 자기소개서에 없는 돈을 쪼개 관리하며 최소한 적자 운영은 하지 않았던 노하우나 학부모들을 상대하며 쌓은 영업 경험을 깨알같이 적었다. 면접까지 올라가니 학원 경험에 대한 질문이 쏟아졌다. IMF라고 자포자기하지 않고 학원을 창업한 도전을 면접위원들이 높게 평가한 것이다. 성씨는 대신증권에 일단 인턴으로 취직해 10년간 일했다. 중간에 정규직으로 전환돼 남들 부러워하는 억대 연봉도 받았다.

2008년 이번엔 글로벌 금융 위기가 터졌다. 당시 여의도 증권가는 초상집 분위기였다. 회사에 출근하면 "수십억원을 날린 증권사 직원이 자살했대"라는 소식이 들렸다. 그중엔 성씨 지인도 있었다. 돈벌이만 최고로 여기던 월급쟁이 생활에 회의감과 후회가 밀려왔다. 성씨는 '이제는 돈보다 사회를 위해 뭔가 하고 싶다'고 결심했다. 다닌 지 꼭 10년 만인 2009년 사표를 냈다. 두 번째 경제 위기가 그의 인생을 다시 한 번 바꾼 것이다.

증권사를 그만둔 뒤 대학원에 진학해 공부하는 등 3년간 창업을 준비했다. '학원 실패 경험을 되풀이할 수 없다'는 각오였다. 2012년 창업한 '오마이컴퍼니'는 인터넷을 통해 각종 후원 사업 및 스타트업 창업에 필요한 투자금을 모아주는 일종의 크라우드펀딩(대중 모금) 회사다. 오마이컴퍼니는 세월호 희생자들을 추모하기 위한 '세월호 기억 팔찌' 프로젝트로 큰 호응을 얻었다. 2014년 5월 시작된 이 프로젝트로 지금까지 총 4억5000만원을 모았고 이 돈으로 90만개 이상 팔찌를 만들었다. 또 폐자전거 프레임 재활용과 취약 계층을 돕는 유리병 재가공 등 주로 사회적 약자를 돕는 사업을 하고 있다.

투자를 중개하면 투자금의 3~7%를 수수료로 받는 게 이 회사가 돈 버는 법이다. 성씨는 "연간 소득이 5000만원을 넘지 않으니 증권사 다닐 때보다 연봉이 반 토막 난 셈"이라며 "그래도 정신없이 살던 증권사 시절보다 주위를 돌아보며 남을 도울 수 있으니 지금이 더 성공한 삶이라고 자부한다"고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