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상에 쓸모없는 詩는 없습니다"

'2017 TT 시집 공모. 신춘문예 시 부문 낙선작 공모합니다. 선착순 60편.'

신춘문예 당선작이 새해 첫 신문에 발표된 지난 2일 트위터에 이런 공고 한 줄이 올라왔다. 발신인은 '문학과죄송사'. 유명 문학 출판사인 '문학과지성사'를 패러디한 1인 독립 출판사였다. 공모는 7일 만에 마감됐다. 낙선작을 모은 시집 '2017 TT'는 오는 4월에 500부로 출간될 예정이다.

문학과죄송사 사무실은 서울 서대문구 엘리베이터 없는 45년 된 아파트 8층에 있었다. 박준범(39·사진) 대표의 집이자 사무실이었다. 박씨는 "이번 시집 '티티(TT)'는 눈물을 의미하지만 슬프게 표현하고 싶진 않았다"고 했다. "재미를 추구한다"는데 얼굴에 웃음기가 거의 없다.

그는 "쭉 떨어지기만 하는 인생이었다"고 했다. 학창 시절 미술을 하고 싶었지만 "그림 그려서 어떻게 먹고사느냐"며 아버지가 반대했다. 연극영화과 진학은 가까스로 허락받았지만 성적이 안 됐다. 점수 맞춰 독문학과에 갔다. 여전히 영화감독을 꿈꿨지만 영화 아카데미·예술학교 입학시험도 다 떨어졌다.

아버지는 당뇨 합병증으로 쓰러져 거동을 못하게 됐다. 장남인 그가 20대 전부를 바쳐 동생과 병시중을 했다. "활달하고 잘 웃던 제가 말수를 잃고 어두워졌어요. 희망은 없었지만 죽고 싶진 않았어요. 밤마다 이불을 뒤집어쓰고 생각했죠. 이건 시트콤이야. 남보다 10년 늦게 하고 싶은 거 하자. 나는 서른 살일 때가 사실 스무 살인 거야."

그는 "암울했던 시절 기형도의 시들이 위안을 줬고 틈틈이 시를 끼적였다"고 했다. 2009년 아버지가 돌아가신 뒤 막걸릿집 아르바이트를 하다 '문학과죄송사' 아이디어를 떠올렸다. "문학과지성사를 통해 책을 내는 건 불가능하니까 패러디했죠. 죄송한 마음으로."

2013년 책 디자인을 했던 단골손님의 도움으로 첫 시집 '우주는 잔인하다'를 스스로 출판했다. 아버지 병간호와 짝사랑하던 여인에게 거절당한 기억들이 시가 됐다. 70만원을 들여 300부를 찍어 소규모 서점에 뿌렸다. 최근 3쇄를 찍은 이 책은 모두 1000부가 팔렸다. 그간 문학과죄송사는 박씨의 시집 2권을 포함해 총 5권을 세상에 냈다. 일반인 60여명의 시를 모은 시집, 등단한 적 없는 이의 시집 등이다.

"책이 나와서 손에 잡히는 날은 정말 기분 좋죠. 자랑하고 싶고." 이번 시집 공모엔 70세 남성, 통신연구원 등 등단을 꿈꾸는 무명작가들의 낙선작이 모였다. "예술이 대단해야만 하는 건 아니잖아요. 내가 공들여 쓴 시는 다 의미가 있는 거죠. 낙선했다고 없어지진 않아요. 보여줘도 되겠다는 판단이 섰으면 주저 말고 세상에 내놓는 태도가 중요한 거죠. 평가는 독자가 하니까." 엷은 웃음이 입가에 번졌다. 박씨는 "탈락한 시들 가운데 독자의 가슴에 와 닿는 시 한 편은 꼭 있을 것"이라고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