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파게티 해주면 손녀가 정말 좋아해… 요리엔 행복이 있어요"

"오늘 메인 요리는 전복 스테이크로 정했어요. 설 연휴 때 아빠가 요리해주면 근사할 것 같아서요."

송영미(54)씨 목소리가 살짝 흔들렸다. "떨린다, 진짜. 요리 수업을 제가 진행하기는 처음이에요. 항상 애들 아빠가 했었거든요." 송씨 말을 경청하던 중장년 남성 다섯 명이 합창했다. "전부 아군(我軍)이니 걱정 마세요! 김 선생님처럼 쉽고 간단하게 가르쳐 주세요!"

이달 초 요리교실 '남자들의 요리'가 2년여 만에 다시 열렸다. 소문난 미식가였던 고(故) 김승용씨가 준비해오던 요리책 '이렇게 쉬운 미식 레시피'(레시피팩토리)를 아내 송영미씨와 딸 김정현(28)씨가 마무리해 출간한 걸 기념하는 자리였다. 독일 고급 주방 브랜드 한국 대표를 지낸 김씨는 서울 대학로와 논현동에서 이탈리아 레스토랑과 퓨전 레스토랑을 운영했다. 손님을 집으로 불러다 직접 만든 음식을 먹이는 게 그의 취미였다. 감탄한 남자들로부터 "우리도 가르쳐 달라"는 요청이 쏟아지면서 5년 전 서울 논현동 자택에 요리교실을 열었다. 6개월 이상 대기해야 수강할 수 있을 정도로 인기가 높았다.

'남자들도 쉽고 폼 나게 따라 할 수 있는 요리를 가르친다'고 소문이 나면서 기업 대표와 고위 임원, 변호사, 의사, 건축가, 디자이너 등 전문직 남성들의 신청이 쇄도했다. 김씨의 어머니는 '한국 미용계의 대모'로 불렸던 헤어 디자이너 그레이스 리(이경자)씨다. 서울 청담동과 경남 통영에서 식당을 운영했던 어머니의 탁월한 미각을 김씨가 물려받았다. 하지만 2015년 김씨가 암으로 갑자기 세상을 떠났다. 요리교실도 폐강됐다.

이날 잠시 부활한 '남자들의 요리'에는 김씨 요리 수업에 열심히 참여했던 '모범생' 5명이 모였다. 가장 연장자인 박동혁(75) 대원화성 회장은 "김 선생님에게 요리를 배우고 인생이 달라졌다"고 했다. "아버지로서, 할아버지로서 존재감이 커졌어요. 스파게티 해주면 손녀딸들 반응이 최고죠. 요리에 그런 행복이 있다는 걸 알게 됐어요."

오재국(46) 보아스이비인후과 원장은 "요리를 알고 나니 아내와 함께 여행을 가거나 장보는 일이 더 즐거워졌다"고 말했다. 박동훈(53) 핸즈BLT미디어그룹 대표는 "아내와 자식들은 원래 가깝잖아요. 아버지가 요리를 배우면 아내와 자식 사이에 들어가 가족을 회복하는 데 큰 도움이 돼요"라고 했다.

'남자의 요리는 쉽고 폼 나고 술안주가 될 수 있어야 한다'는 것이 김승용씨 지론이었다. 살라미(이탈리아 소시지의 일종)에 얇게 저민 마늘과 후춧가루만 얹어도 훌륭한 안주가 된다는 식이었다. 그의 수업은 느긋했다. 한 달에 한 번 모여 4~5가지 요리를 맛보고, 만드는 법은 한 가지만 배웠다. 김씨는 학생들에게 식재료를 싸주고 집에 돌아가서 요리를 만들어 인증 샷을 보내게 했다.

오재국 원장은 "좋은 재료를 쓰면 요리의 절반은 완성된 것이라고 김 선생님이 자주 얘기했다"고 말했다. 박영훈(53) 인덕대 멀티미디어디자인학과 교수는 "김 선생님과 함께 전통시장에 가서 제철 재료와 좋은 가게 고르는 법을 배우는 시간이 참 즐거웠다"고 추억했다. 김형섭(44) 이꼬르 대표는 "레시피는 인터넷에 엄청나게 많지만 시도도 못 해봤어요. 김 선생님 수업에 참여하면서 한두 가지 재료가 빠지더라도 맛의 균형만 맞으면 된다는 걸 배웠어요. 새로운 요리에 도전해볼 자신감이 생긴 거죠"라고 했다.

2년 만의 요리 수업은 올리브 파이를 맛보며 시작해 구운 아스파라거스와 수란을 거쳐 전복 스테이크와 매시포테이토 만드는 법을 배운 뒤 민트를 곁들인 딸기와 바닐라 아이스크림을 후식으로 먹으면서 끝났다. "요리 수업이 없어지니 인생의 낙이 사라졌어요." 수강생들이 "요리 수업 다시 시작하자"고 김승용씨 아내 송씨를 졸랐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