입력 : 2017.01.19 09:41

정말 뭘 모르는 나다. 제주에 가서야 알았다. 올레길을 걷다가 ‘몸짬뽕’을 내건 중국집을 지나게 됐다. 대체 몸짬뽕이 뭐지? 마음보다 몸에 좋은 짬뽕이란 거야 뭐야? 일단 그 집에 들어갔다. 반기는 종업원에게 실망스런 말을 했다. 뭐 먹으러 온 거 아니에요, 몸짬뽕이 뭔가 궁금해서 와봤어요. 해답이 바로 보였다. 김이 모락모락 나는 짬뽕 사진과 함께 설명이 벽에 붙어있었다. ‘몸은 제주도 바닷가에 서식하는 해초의 일종인 모자반의 제주도 방언입니다….’ 아, 그렇구나. 그 옆에 또 하나의 요리가 사진도 없이 이름만 걸려있었다. ‘딱 새우 튀김’.

바삐 움직이고 있는 종업원에게 묻지도 못하고 나와서 걷는 내내 물음표가 솟아났다. 딱 새우의 맛이나 모양이 나는 튀김이란 건가? 종일 걸어 지쳐서 잠에 떨어지고 나니, 다음 날 그 요리 이름은 머릿속에서 싹 지워졌다. 몇 달 후 친구와 얘기 중 문득 생각이 났다. 제주에 갔더니 딱 새우 튀김이란 게 있더라. 딱 새우튀김과 같다는 요리란 건가? 친구는 마구 웃었다. 제주에서 잡히는 새우 이름이 딱새우야. 어머, 그러니? 딱, 새우, 튀김을 다 떼어 써놨으니 새우 이름인 줄 알게 뭐야. 나의 소심한 변명이었다.

여태껏 그런 이름도 모르고 살았구나 싶어 인터넷을 뒤져봤다. 딱새우는 우리 남해 동부와 제주도 인근에서 잡힌다는 일명 ‘가시발새우’다. 하지만 제주에선 딱딱해서 딱새우고, 씹을 때 딱딱 소리가 난다고 해서 딱새우고, 껍질이 빈틈없이 붙어 있다고 해서 딱새우라고 불린단다. 일반 새우는 껍질이 연하고 살이 단단하니 쫄깃하지만, 딱새우는 껍질은 단단하지만, 살은 입에 넣으면 녹을 정도로 부드럽다고 한다. 글쎄, 나는 아직 먹어보질 않아서 “~카더라” 외엔 말할 수 없다.

사진=조선일보DB
가장 좋은 여운

그런데 ‘딱사람’에 대해선 말할 게 조금은 있을 듯하다. 딱딱해 보이지만 지내보면 부드러운 딱새우 같은 사람이 아니라, ‘딱 거기까지’인 사람을 나는 일명 딱사람이라고 칭해본다. 나 자신부터가 거기 해당될 듯하니 말이다. 누구에게 신세를 지면 그만큼은 꼭 갚아야 하는 사람, 상대 또한 그러길 바라고 안 그러면 서운해하는 사람, 맡은 책임과 의무는 어떻든 해내려 하고 그렇지 않은 이를 못마땅해하는 사람. 혹 ‘서울깍쟁이’라든가, 경우가 바르다는 이들 가운데 딱사람이 왕왕 있을지도 모르겠다. 누구에게 폐 끼치지 않고 사는 데는 딱이겠지만, 그러나 딱 거기까지다. 여운이 없어서다.

아침에 듣고 종일 흥얼거리게 되는 음악, 비가 그친 뒤에도 숲에 들어가면 후드득 떨어지는 빗소리, 산에 올라 외치면 저 멀리서 다가오는 메아리, 불꽃놀이가 끝난 밤하늘에 수평으로 조용히 번지는 연한 흰색의 연기, 장미 다발을 쌌던 종이에서 나는 꽃내음, 잔잔히 밀려오는 종소리…. 이런 좋은 여운 중에서도 가장 좋은 건 역시 사람의 여운이다. 세밑에 지인들을 만나노라니 누구는 언제 또 보나 고대 됐지만, 누구는 1년쯤 안 보고 지내도 그만일 듯했다. 여운과 딱 거기까지의 차이 탓에다. 나는 어떠한가. 한 살을 더 먹고도 여전히 딱 거기까지에 머물러있는 건 아닌지 자신을 돌아보지 않을 수 없다.

그리고 평범한 진리를 새삼 깨닫는다. 내가 좀 더 주지 않으면, 언제나 딱 거기까지일 수밖에 없음을. 플러스 마이너스 제로 선에서 나아가지 못하는 것이다. 경조사를 챙길 때만 해도 딱 받은 액수만큼의 봉투를 주면 제로가 되는 셈이다. 아예 모른 체하는 이들마저 있는데, 받은 것보다 더 주기란 쉽지 않다. 하지만 물건 하나도 이왕이면 덤을 주는 가게에 가서 사고 싶듯이 여운은 좀 더 줄 때 일어난다. 말로든, 글로든, 물건으로든 마음을 좀 더 써줄 때다. 결국은 마음의 빚이 생기지만, 다른 빚과는 달리 져도 된다는 빚 아닌가.


외로움도 떨쳐내

지역 독서회에서 만난 소설가 선배 한 분에게 나는 그런 빚을 지고 있다. 만나 뵌 지 얼마 안 된 어느 봄날, 직접 뜯은 쑥으로 만든 따끈한 떡을 내게만 살짝 쥐여주시는 거였다. 지난 연말엔 찹쌀떡과 콩자반에 연근조림까지 받았다. 종종 주시는 먹거리 선물에 깃든 정성에 그저 감사하고 황공할 따름이다. 요리에 별 소질이 없는 나는 특별한 문화행사에 그분을 초대하곤 한다. 우리는 서로 말한다. “이런 과분한 대접을 받아도 되나요?” 선배가 먼저 시작하지 않았다면, 나는 얘기가 통하는 분 정도로만 여겼을 터이다.

선배는 대접받기보다 먼저 대접하고, 나이 들어갈수록 좀 더 마음을 담아 주어야 함을 행동으로 보여줬다. 그러다가 뒤늦게 친구가 되는 것 또한 소싯적부터 이어온 관계에 못지않다는 생각이다. 오래돼서 익숙한 사이에선 굳이 말을 안 해도 통하는 게 있지만, 무신경한 말로 은근히 상처를 줄 때도 잦다. 관계 증진에 별 노력을 기울이지도 않는다. 나이 들어 만난 새로운 친구에겐 그렇지 않다. 약간의 긴장과 기대로써 살아온 ‘인생 책’을 한두 쪽씩 조심조심 넘기다 보면 어느새 서로의 딱 거기까지는 사라지고 없다.

딱 거기까지를 떨친다면 저마다의 외로움도 조금씩 떨쳐낼 수 있지 않을까. 이성 간에서는 또 다른 문제여서, 나이 따라 점점 동성의 친구들이 좋아지나 보다. 나이 차이는 문제가 아니다. 내게는 10여 년, 20여 년 위의 띠동갑 친구들이 있다. 인생의 지혜를 듬뿍 얻게 되는 참 소중한 분들이다. 올해는 그만큼 아래의 띠동갑 친구도 생기면 좋겠다. 어지럽도록 변화의 속도가 빠른 요즘에 더 젊은 친구를 갖는다는 건 그 얼마나 큰 축복인가. 나의 딱 거기까지에서 벗어나려는 노력이 정말로 필요할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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