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끄러운 세상… 웅대한 自然 가슴에 품고 쉬어가시길"

"나라 없을 때 태어나 해방과 전쟁을 겪어 그런가 난 이념이나 정치가 싫어요. 그런 것들에 갇히면 (좋은) 그림 그릴 수가 없고요. 세상도 시끄러운데 내 그림 보며 잠시 쉬었다 갈 수 있다면 그뿐."

시국(時局)에 관한 물음에 팔순 노객이 에둘러 답했다. 그러면서 무심히 그림 한 점을 가리켰다. 비바람 몰아치는 대숲 같기도 하고, 폭포 흐르는 바위산처럼도 보였다. "저 그림을 빗자루로 그렸어요. 대나무 싸리비요." 어느 겨울 잔설 내린 마당을 쓰는데 결이 아주 곱고 선명하더란다. 작품 제목이 '바람 부는 날'(2015년 작)이다. "인간의 분노와 희망에 보탬이 되지 않는 그림을 그린다고 해도 난 괘념치 않아요. 폭력과 외설, 첨단과학에 의한 온갖 이미지가 난무하는 시대에 우리가 되찾아야 할 것은 자연을 경외하는 마음이니까요."

"보이지 않는 것을 그리겠다"는 일념으로 한국 추상회화를 우직하게 이끌어온 윤명로(81·사진) 회고전 '그때와 지금'이 서울 인사동 가나인사아트센터(3월 5일까지)에서 열린다. 서울대 미대에서 김환기·장욱진에게 배웠고 이우환과는 함께 회화과를 다니며 '앵포르멜'(비정형회화) 미술운동의 주축이 됐다. 대학 3학년 때 사르트르 소설에 감동받아서 그린 '벽B'가 대한민국미술전람회(국전)에 특선을 받으면서 주목받지만, "예술을 서열화해선 안 된다"며 반(反) 국전운동을 펼친 '이단아'이기도 했다. "그때만 해도 국전은 꽃이나 풍경, 미인도를 잘 그리면 상을 줬어요. 세계가 어떻게 돌아가는지도 모르고."

윤명로의 60년 화업(畵業)은 변화를 거듭했다. 4·19, 5·16을 목도하며 시대의 부조리를 빗댄 '룰러(자)' '균열' 연작을 시작했지만 "사변적 사고에 빠지니 그림이 쇠약하고 허망한 모습으로 바뀌어" 붓을 놓았다. 80년대 '얼레짓' 연작은 창공을 나는 연처럼 정신의 흔적을 찾아 떠난 여행. 시골의 한 토끼사육장을 작업실 삼아 그려나간 90년대 '익명의 땅' 연작은 자연의 웅대한 에너지를 담으려는 화가의 붓질이 도도하다. 서울대에서 정년퇴임한 2000년대에는 '우리 것'에 천착했다. 수묵 대신 철가루로 그린 산수화 '겸재예찬'은 파리비엔날레에서 극찬을 받았다. "프랑스 사람들이 겸재 정선이 누구냐 묻기에 너희 나라 세잔 같은 사람이라고 했지요. 중국의 관념적 산수화를 해체하고 진경산수화를 창안한 겸재의 정신을 후배들에게 화두로 던져주고 싶었습니다."

"고인 물 되기 싫어" 10년마다 그림 세계를 달리해온 윤명로 작품을 이번 전시는 시대별로 나눠 보여준다. 가장 최근작 '고원에서'는 "미답의 세계, 한 번도 가보지 못하고 경험하지 못한 세계에 도달하고픈 염원을 담아" 그린 역작이다. 대학 1학년 때 그렸다는 '무제'(1956년 작)도 눈길을 끈다. "내 그림 중 유일하게 사람 얼굴이 보이는 구상이죠. 동숭동 (서울대) 캠퍼스가 보이고 뒤에 낙산도 보이고요. 이번 전시 준비하다가 수십 년 만에 찾아냈어요."

단색화 열풍을 타고 재조명받는 70년대 '균열' 연작엔 재미난 일화가 있다. "미국에서 막 돌아와 연 전시인데 한 작품도 안 팔렸어요. 논바닥처럼 쩍쩍 갈라진 그림을 갖다 걸면 집안이 망한다며(웃음)."

전시를 둘러보던 누군가 "저 그림은 세계지도 같다"고 하자 화가가 빙글 웃으며 물었다. "어떤 이는 누드화냐고 묻던데요?" 추상의 서늘한 마력에 흠뻑 빠질 전시다. (02)730-102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