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떻게 생각하십니까] 지하철 화재… "기다리라" 해도 승객은 기다리지 않는다

22일 오전 6시 28분 서울 지하철 2호선 잠실새내역(구 신천역) 승강장으로 천천히 진입하던 전동차가 멈춰섰다. 객차 둘째 칸 아래쪽에 달린 LB박스(전동차 메인 전원 차단 및 공급 장치)에서 갑자기 불꽃과 연기가 일었기 때문이다. 화재로 전기가 자동으로 끊기면서 전동차가 멈춰선 것이다. 객차 10량 중 9량이 승강장에 진입한 상태였다. 발화(發火) 지점 주변에 인화성 물질이 없었기 때문에 불이 크게 번지지 않았지만, 희뿌연 연기가 승강장으로 퍼져나갔다.

1분 뒤인 6시 29분 객차 내에 "차량 고장으로 비상 정차했으니 안전한 차내에서 기다려달라"는 안내 방송이 나갔다. 기관사 박모씨는 서울메트로 관제센터와 소방서에 상황을 알린 뒤 6시 31분 관제센터의 지시에 따라 "즉시 출입문을 열고 대피하라"고 방송했다. 비상 정차 후 대피 방송까지 3분이 걸린 것이다. 그러나 연기를 본 대다수 승객은 대피 방송이 나오기도 전에 이미 수동으로 출입문과 스크린도어를 열고 열차를 빠져나가고 있었다.

당시 열차에 타고 있었던 한 승객은 사고 후 SNS에 "연기가 나는데도 '별일 아니니 나가지 말고 객차 안에서 기다리라'고만 방송했다"며 "승객이 스스로 문을 열어서 대피했고, 나가니 연기가 가득했다"고 적었다. 또 다른 승객은 "일단 불이 나면 대피부터 하라고 해야 하는 거 아닌가요? 문도 안 열어줘서 강제 개방해서 대피했습니다" 등 불안했던 당시 상황을 전했다. 승강장에 진입하지 못한 마지막 칸 열차 승객을 포함해 100여명이 모두 전동차를 빠져나간 시각은 화재 발생 12분 뒤인 6시 40분이었다. "대피 방송이 늦었다"는 지적에 대해 서울메트로 측은 "정확한 상황 파악 없이 대피를 지시했다가 더 위험한 상황이 생길 수 있다"며 "매뉴얼에 따라 초동 조치를 한 것"이라고 밝혔다. 이날 불은 객차 둘째 칸 외벽을 그을린 뒤 30여분 만에 꺼졌다. 화상을 입거나 연기에 질식된 사람은 없었다.

사고가 났을 때 탑승객들이 안내 방송이나 지시를 기다리지 않고 먼저 탈출한 것은 이번이 처음이 아니다. 세월호 참사 직후인 2014년 5월 서울 지하철 2호선 상왕십리역 열차 추돌 사고 때도 승객 대부분이 "밖으로 나오지 말고 대기하라"는 안내 방송을 따르지 않고 객차에서 탈출했다. 한 남성이 "세월호 때도 시키는 대로 가만히 있다가 다 죽었다"고 소리치면서 객차에서 먼저 빠져나가려는 승객들이 서로 밀치는 상황이 벌어졌다. 작년 1월에는 서울 지하철 4호선 열차가 한성대입구역과 성신여대입구역 사이 터널에서 갑자기 멈춰서 승객 800여명이 전동차 문을 강제로 열고 빠져나와 반대편 선로를 따라 대피했다. 그 시간에 반대 방향 전동차가 운행하고 있었다면 대형 참사로 이어질 수 있었던 아찔한 순간이었다.

승객들의 자력(自力) 탈출은 "'세월호 트라우마'가 여전히 뿌리 깊게 남아 있다는 방증"이라고 전문가들은 진단했다. 그러나 "위급 상황 시 매뉴얼을 무시하면 더 큰 사고로 이어질 수 있다"는 지적이 많다. 이영주 서울시립대 소방방재학과 교수는 "세월호 참사 때 선내의 잘못된 지시가 더 큰 피해를 불러왔다는 생각에 관계자 지시에 대한 불신이 커졌다"며 "그렇지만 위급 상황에서는 대응 매뉴얼을 적극적으로 따르고 신뢰하는 것이 중요하다"고 말했다. 김찬오 서울과기대 안전공학과 교수는 "어떤 재난이 발생해도 상황을 정확히 파악한 후 움직이는 것이 매뉴얼의 기본"이라며 "승객들의 불안감은 이해하지만, 작은 사고가 대형 2차 사고로 이어지는 악순환을 막으려면 기관사의 판단을 믿고 따라야 한다"고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