입력 : 2017.01.24 09:55

생애를 나누어 이야기하는 것이 모두 다르지만, 나는 초반 30년을 준비기라 하고, 중반 30년을 활동기라 하였다. 그리고 후반 30년을 옛 같이 죽음을 기다리는, ‘잠깐 남아있는’ 여생(餘生)이라 할 수 없어, 여생 아닌 노년본생기(老年本生期)라 불러왔다. 지금의 ‘노년본생기’는 홀가분하게 짐을 벗고, 부담 없이 하고 싶은 일 마음대로 할 수 있는 시기이기도 한 것이다.

이제 75세, 그 노년본생기를 반 지나 정상에 다다랐고, 내려갈 길만 남아 있는 셈이다. 산에 오를 땐, 올라가는 길보다 내려가는 길이 더 위험하다고 한다. 이제 잠시 멈추어 서서 땀을 닦아 숨을 고르며, 올라온 길과 내려갈 길을 함께 살펴보아야겠다.

노년본생기 전반(前半) 대학에서 신학(神學)과 복지(福祉)공부를 하여, 이를 바탕으로 노인복지시설 봉사활동을 하였다. 부모님께서 물려주신 땅에 농사도 지었으며 이제 그 일들을 접고, 이후에 할 일들과 할 수 있는 일들을 모색해 볼 때가 된 것이다.

사진=조선일보DB

우선, 나와 내 주변을 홀가분하게 단순화하는 일이다. 퇴직 후, 선친께서 물려주신 땅을 처분하지 않고 농사를 지었으니, 이제 매각해도 부담이 덜 될 것 같다. 40여 년 잡았던 운전대를 놓는 일도, 아이들이 사 준 스마트폰을 간단 휴대전화로 바꾸는 일도, 나와 내 주변을 단순화하기 위해 하여야 할 일들이다. 그리고는 그동안 지내 온 일들을 정리하는 일이 남아있고, 그 중 내 글들을 모아 글집 또는 전기(傳記)를 만들어야 할 차례이다.

문중 일을 돌보며 종원들에게 나누어 줄 문중기록서를 편집 발간하기도 하였다. 집안이나 씨족 개념이 많이 쇠퇴했지만, 그래도 같은 피와 살과 뼈를 이어받은 후손들이 숭조애종(崇祖愛宗)하는 정신을 갖고 조상에게 부끄럼 없는 삶을 살자는 의미를 그 책 속에서 강조하였다. 이제 문중의 일도 젊은 사람들에게 물려 줄 때가 되었다.

가장 중요한 일은 누구에게나 필연적으로 오는 그날, 끝날을 위하여 준비하는 일이다. 웰빙(Wellbeing)했으니 웰다잉(Welldeying)도 이루어야 하리라고 짐짓 생각해 본다. 물론 마지막 단계에 자손들에게 남겨 주고 물려 줄 것들을 생각하여야겠지만, 믿음생활을 더욱 굳건히 하여 다음 세상을 준비하는 일이 가장 중요하다고 본다. 사실 짧은 이 세상의 생애도 잘 살기 위해 노력해 왔다면 더 영원한 저 세상살이를, 지금 보이지 않는다 해서 소홀히 할 수 있겠는가?

노인복지를 전공하고, 호스피스(임종기에 처한 사람이 평안하게 임종을 맞을 수 있게 도와주는 일)를 연구하고 체험할 때 작성한 나의 유서나, 마지막 란에 사인을 남겨놓은(?) ‘사전의료의향서(事前醫療意向書)’ 를 다시 꺼내어 본다. 쓰인 유서의 요지는, ‘자랑할 것도 없지만, 부끄러움 없이 살려고 노력했던 삶’ 이었음을 자식들에게 알리고, 하나님께서 귀하게 주신 삼 남매에게 각기 위치에서 ‘성실하게 살아갈 것’ 을 주문하는 글로 되어있다. 남들같이 많은 재산을 물려주지 못해 미안하나, 나의 살아온 족적들을 보여 준 것으로 위안을 삼는다는 뜻도 후기로 실었다.

사전의료의향서란 명료한 정신 상태에서 작성함을 알리고, 건강을 회복할 수 없는 상태가 되고 진단과 치료에 대하여 스스로 의사 표시할 수 없어질 때 담당 의료진과 가족들이 사전의료의향서에 기록된 당사자의 뜻을 존중해 줄 것을 바라는 취지에서 작성해 두는 것이다. 물론 뇌 기능의 심각한 장애, 질병의 말기, 노령과 관련된 죽음에 대하여 연명 치료를 불원(不願)한다는 것을 선별하게 되어 있고 생명 유지장치나 인위적인 영양공급을 거절한다는 뜻을 표시하게 되어있다. 본인의 작정만으로 가능한 일인지 법적으로 거부 여건은 없는지 더 살펴보아야겠지만, 웰다잉(Welldeying)을 위해서는 한 번쯤 생각해보아야 할 문제라고 본다.

무엇보다 건강을 유지하여 본인은 물론 자식들에게도 폐가 되지 말아야겠기에 올겨울엔 건강 진단, 건강 모색의 시간으로 보내야겠다.

75세! 이제 노년의 내리막길을 가야 한다. 정리하고, 버리고, 물려줄 것들을 차근차근 챙겨야 하겠다. 물론 눈에 보이는 것들뿐 아니라, 눈에 보이지 않는 무형의 재산까지도 잘 정리하고 물려주어, 떠난 자리가 흉이 되는 일만은 절대 안 되게 하여야 하리라!

망서려지는 마음을 짐짓 감춘 채, 이 글을 쓰며, 이 또한 노인의 ‘이른 망령’이라고 흉보지 않을까 조심스럽게 생각하면서, 지나온 날들과 앞으로의 날들을 머릿속에 그려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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