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중섭 잘될 줄 몰랐지… 사진 한장 못 찍은게 내 최대 실수"

김환기·장욱진 등 수많은 예술가의 사진을 찍었지만 "이중섭은 예술사적으로 무슨 족적을 남길 사람 같지 않아 사진 한 장 찍어두지 못했는데, 이게 사진 인생 최대 실수"라고 그는 고백했다. 마지막 기회가 있긴 했다. "서울 수복 얼마 후 일이다. 내가 마침 명동을 지나칠 때 한 사나이가 배를 시멘트 바닥에 깔고 의식을 잃고 빈사 상태로 누워 있는 광경을 보았다. 화가 이중섭이었다. 사진가로서 응당 그 모습을 찍어야 했는데 찍지를 못했다. 기록성을 신봉하는 사진가라면 철두철미 냉정을 기하여 이성의 눈으로 찍어야 옳았겠으나 인간적 우정으로는 도저히 셔터를 누를 수 없었다."

사진계 거목 임응식(1912~2001)이 화가 이중섭(1916~1956)에게 갖고 있던 회한을 뒤늦게 고향에서 풀게 됐다. 부산시립미술관에서 열리는 '시간의 산책자들' 전시에서다. 동시대 부산에서 활동했던 1세대 사진 작가 정인성(1911~1996)과 함께다. 부산시립미술관 김영순 관장은 "부산 시민들 뜨거운 호응 속에 열리고 있는 '이중섭 백년의 신화' 전시에 맞춰 같은 시기 부산에서 활약했던 임응식·정인성 작가의 사진전을 기획했다"고 말했다.

이중섭은 부산과 각별한 인연이 있다. 전쟁 중이던 1950년 12월 원산에서 피란 와 제주도로 가기 전 가장 먼저 밟은 남한 땅이자 1952년 7월 가족을 일본으로 떠나보내며 홀로 남은 도시였다. 1953년 말까지 문현동·대청동·범일동·광복동 등 피란촌을 전전했다. 은지화(銀紙畵·담뱃갑 은박지 위에 긁어 그린 그림)와 가족에게 보낸 편지화도 부산에서 처음 시작됐다.

임응식과 정인성 사진에는 피란 시절 이중섭이 보고 겪은 부산 풍경이 그대로 담겨 있다. 미군 부대나 항구에서 날품팔이를 하고 저녁이면 광복동·대청동 일대 다방에서 시간을 때우다 전차를 타고 범일동 판잣집으로 돌아와 고된 몸을 누이던 작가. 이진철 학예연구관은 "'이중섭, 백년의 신화'전에서 이중섭의 걸작, 그리고 일본으로 떠난 아내와 자식들에게 절절히 쓴 편지를 읽은 뒤 그 옆 흑백의 사진 전시장으로 옮겨오면 마치 그 시대로 돌아온 듯한 착각이 들 만큼 감동이 배가된다"고 전했다.

종군기자로 활약했을 만큼 기록 사진 대가였던 임응식 작품은 강렬하고도 해학적이다. 노점 수레에서 술과 양담배, 화장품을 팔고 있는 소녀를 비롯해 이른 아침 꽃 팔러 나가는 처녀들의 뒤태, 전차 오는 줄도 모르고 지팡이 짚은 채 대로를 유유히 건너는 노파, 가난이 덕지덕지 묻어나는 영도 판자촌을 모처럼 투피스 입고 마실 나선 아가씨까지…. 서울 명동에서 벙거지를 눌러쓴 채 일거리를 찾는 남자의 모습을 담은 '구직(求職)'도 함께 걸려 있어 눈길을 붙들어 맨다.

정인성도 이에 못지않다. 대중에겐 낯설지만 '한국의 앙리 카르티에 브레송'이라 할 만큼 시적이면서 회화 같은 사진을 남긴 작가다. 범어사, 자갈치시장, 충무동, 송도, 구포에 이르기까지 부산 구석구석 풍경을 앵글에 담은 작가는 가난하지만 마음은 따뜻했던 시절의 추억으로 관람객을 파고든다. 특히 해 질 녘 영도의 아이들을 찍은 사진은 일품이다. 달맞이꽃 피어난 들판에 세 아이가 오종종 모여 앉아 재잘대는 풍경은 척박하고 고달픈 현실에 햇살 같은 희망을 안겨줬다.

미술관 1층 로비에도 색다른 볼거리가 있다. 부산의 젊은 작가 송현철이 거장 이중섭에게 경의를 표하려 설치한 '더 히어로'다. 빈 깡통으로 구현한 '황소'와 이중섭 전시장을 향해 거수경례하는 로봇이 꼬마 관람객들을 신나게 한다. 전시는 2월 26일까지. '시간의 산책자들' 전시는 관람료가 따로 없다. (051)740-424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