만화가 원수연 데뷔 30년 '풀하우스' '매리는 외박 중' 등 줄줄이 히트작, 드라마로도 성공 "차기작은 초능력자들의 이야기"
/이코믹스
순정(純情). "사랑 빼놓고 세상이 설명되질 않죠. 작은 식물마저도 필요로 하는걸요." 순정만화. "이걸 빼놓고 저를 설명할 수가 없죠. 살아남기 위한 전략인지도 모르겠네요." 데뷔 30년, 만화가 원수연(56)씨가 말했다.
1987년 '그림자를 등진 오후'로 데뷔해 삶의 대부분을 순정만화에 바쳤다. '엘리오와 이베트'(1991) '풀하우스'(1993) '매리는 외박중'(2009) 등 히트작을 줄줄이 내놨고, 드라마화에도 성공해 대박을 터뜨렸다. 길쭉한 체구의 세필화적 그림체, 정통과 파격의 폭넓은 줄거리가 소녀들 가슴에 불을 질렀다. 사랑은 남녀를 뛰어넘는다. 동성애를 소재로 다룬 '렛 다이'(1995)가 그 단적인 예. 금기는 종교로 이어진다. 2014년 12월부터 연재한 웹툰 '떨림'〈사진〉은 가톨릭 신부와 여신도 간의 불가한 사랑을 그린다. "30~40대가 볼만한 성숙한 순정만화를 그리고 싶었어요. 근데 아침드라마만 봐도 성인 로맨스는 대부분 불륜이잖아요. 딴 건 없을까 고민하다 종교에 닿은 거죠." 이 작품은 최근 단행본으로도 발간됐다. 원씨의 첫 올 컬러 만화다.
고교 졸업할 때만 해도 만화를 몰랐다. "2년쯤 직물 디자인 회사도 다녀보고, 평생 해야 할 일이 뭘까 두리번거리고 있었죠." 1985년, 서울 종로에서 그는 골목 하나를 마주하게 된다. "허리우드 극장에 영화를 보러 갔다가 시간이 떠 근처 만화방엘 들어갔어요. 너무 재밌는 거예요. 허영만·황미나 등은 충격 자체였죠." 만화책 맨 뒷장 구인광고를 보자마자 무작정 만화가 작업실로 들이닥치던 이 저돌적 여성은, 1986년 친구가 소개해 준 서병간 화백의 문하생으로 들어간다.
지난달 서울 서교동 작업실에서 만난 만화가 원수연씨. 어느덧 고등학교 1학년 아들과 중학교 1학년 딸을 둔 학부모가 된 원씨는 “조만간 사춘기 자녀 양육기를 웹툰으로 그려볼 생각”이라고 말했다. /장련성 객원기자
처음부터 순정만화를 그리려던 건 아니었다. "특정한 세대의 특정한 감수성을 갖는 여성만의 만화였어요. 지금보다 더 마니아(mania) 같았죠. 다만 생애 주기의 어느 한 부분을 담당하는 것도 중요하다 싶었어요." 소녀 감성과는 거리가 멀다. "이성적인 편이에요. 기념일을 챙긴다거나 아기자기한 면도 없고요. 저보고 '생각했던 거랑 너무 다르다'고 한 문하생도 있었어요." 그는 '직업적 감수성'이라는 말을 꺼냈다. "이렇게 하면 감정을 건드릴 수 있겠다' 싶은 본능적인 감각은 있는 것 같다"고 했다. "게다가 백마 탄 왕자부터 인조인간·외계인까지 등장시킬 수 있잖아요. 소재의 폭이 넓으니 그리는 재미가 있죠."
재밌으면 도전한다. 2009년 '매리는 외박 중'으로 웹툰을 시작했다. "마감이 일주일 단위라는 것 외엔 종이 만화와 같아요. 그 템포가 감정을 깊고 느슨하게 풀어가는 순정만화에 어울리지 않긴 했죠. 순정만화의 호흡을 고려해 마감 주기를 달리하는 플랫폼도 생겨나는 추세예요." 지난해 8월 세계웹툰협회를 창립해 초대 회장을 맡고 있다. "웹툰 시대에 웹툰협회가 없다는 게 이상하잖아요. 회원 400여명 중 대부분이 20~30대 신인이에요. 자주 만나 목소리를 나누는 게 중요하다고 생각합니다."
순정은 차기작으로도 이어질 전망. "복수를 대행해주는 초능력자 얘기예요. 장르는 판타지 로맨스쯤 되겠네요. 연인과 사제와 부모·자식과 사회 각계각층의 사랑 얘기를 담을 거예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