재벌 권한 줄이려는 상법 개정안… 일부선 "헤지펀드 먹잇감 될 것"

2월 임시국회에서 야당은 기업 대주주 권한을 대폭 제한하는 상법 개정안을 처리하기 위해 노력하고 있다. 우상호 더불어민주당 원내대표는 지난 2일 교섭단체 대표 연설에서 "재벌 개혁의 시작은 1%의 소유로 100%를 지배하는 비정상적인 지배구조 개선과 재벌 경영에 대한 감시·감독 강화"라면서 "2월 임시국회에서 상법 개정안을 처리해 달라"고 촉구했다. 작년 7월 김종인 더불어민주당 의원이 대표 발의한 상법 개정안 핵심 취지는 소액주주를 보호해서 대주주 독주를 견제하는 장치를 마련하는 것이다. 하지만 재계에서는 "대주주 영향력을 제한하기보다는 외국 투기 자본만 득세하게 될 것"이라고 우려하고 있다.

◇상법 개정안, 대주주 전횡 견제가 목적

보통 7~9명 이사로 이뤄지는 기업 이사회에서 3명 이상은 반드시 감사위원을 맡는다. 감사위원은 대부분 사외이사가 겸임한다. 감사위원을 두는 취지는 회사 재무 상태 등에 대한 조사와 감시를 통해 경영상 잘못된 결정을 예방하거나 사후 적발, 회사 경영을 투명하게 하자는 것. 그런데 현실적으로 대주주가 선임하는 사외이사가 감사위원까지 하다보니 이 같은 '견제 역할'을 제대로 못하기 때문에 '감사위원 분리 선임 제도'를 통해 소액주주들을 대변할 감사위원을 선출하자는 개정안이 발의됐다. 지금은 이사와 감사위원 선임은 주총에서 이사를 먼저 일괄적으로 선임한 뒤 이들 중에서 감사위원을 뽑는다. 대주주는 이사를 선임할 때 다른 주주들과 마찬가지로 보유 지분만큼 의결권을 행사한다. 하지만 상법 개정안은 감사위원을 뽑을 때는 지분이 아무리 많아도 의결권을 3%로 제한한다. 개정안대로 처음부터 일반 이사와 감사위원이 될 이사를 분리해 선임하게 되면, 대주주는 감사위원 선임 때 의결권이 제한되기 때문에 그만큼 영향력이 약해지게 된다.

'집중투표제'는 주총에서 두 명 이상 이사를 선임할 때 주주(株主)가 보유한 주식 1주마다 선임할 이사 수만큼 의결권을 주고, 이를 특정 후보에게 몰아 줄 수 있도록 하는 것이다. 이미 집중투표제를 도입했지만 회사 정관(定款)에 '집중투표제를 도입하지 않는다'고 규정하면, 이를 시행하지 않아도 되기 때문에 사실상 사문화되어 있다. 이를 의무화하자는 게 이번 개정안 취지다.

'사외이사의 독립성 강화'와 '근로자·소액주주들의 이사회 참여 확대' 방안도 논란이 되고 있다. 그동안 사외이사 제도가 대주주 측 인사들로만 구성되어, 경영 감시라는 본래 취지가 무색해졌다는 지적에 따른 것이다. 현행 상법도 최대 주주와 특수관계인, 주요 주주와 배우자 등은 사외이사를 맡을 수 없도록 하고 있다. 개정안은 여기에 한술 더 떠, 회사나 계열사 임직원이었던 사람도 사외이사를 맡을 수 없도록 했다. 또 최대 주주 등은 사외이사 후보 추천도 할 수 없도록 했다. 직원, 우리사주조합, 소액주주들이 추천하는 1명을 반드시 사외이사에 선임하도록 내용을 개정했다.

'주주 대표 소송'은 회사가 이사에 대한 책임 추궁을 게을리할 경우 주주가 회사를 대신해 소송을 제기하는 것. 개정안은 회사가 주주로부터 이사에 대한 소송 제기 요청을 받고도 이행하지 않으면 그 이유를 주주들에게 통지하도록 하고 있다. 또 모(母) 회사 발행 주식을 1% 이상 가진 주주는 자(子) 회사 이사의 경영 책임을 추궁하기 위한 소송을 제기할 수 있도록 했다. 주총에 직접 나가지 않고도 주주 권리를 행사할 수 있도록 '전자투표제' 도입도 의무화했다.

◇재계는 "투기펀드 먹잇감 된다" 반발

이 같은 상법 개정안에 대해 재계는 "우리나라 주요 기업들이 소수 지분을 가진 외국계 투기펀드 먹잇감이 될 것"이라면서 반발하고 있다. '감사위원 분리 선임' 제도가 가장 뜨거운 논란거리다. 대주주 중심인 한국 기업 특수성은 전혀 고려되지 않은 채 외국에서도 유사 사례를 찾아보기 어려운 제도를 도입하려 한다는 주장이다. 5대 그룹 고위 관계자는 "단기 차익을 노리는 투기 자본 몇 곳이 뭉치면 쉽게 이사회를 장악할 수 있게 된다"고 주장했다.

총수가 지분 10%를 보유하고, 그의 아내(2%), 장남(8%), 차남(7%)이 지분을 가진 A사를 가정해보자. A사 총수 일가(一家) 4명의 지분은 27%다. 지금은 투기 자본이 A사의 경영권을 장악하기 위해서는 총수 일가보다 많은 지분을 보유해야 한다. 상법이 개정되면 감사위원을 선출할 때 총수 일가는 11%의 의결권만 행사할 수 있게 된다. 총수와 장남, 차남 의결권이 3%로 제한되기 때문이다. 만약 2.9%씩 지분을 가진 투기 자본 네 곳이 뭉치면 감사위원 모두를 자신들에게 유리한 인사로 선임할 수 있게 된다.

실제 기아차의 경우, 작년 9월 말 현재 현대차(33.88%), 정의선 부회장(1.74%)이 35.62%를 보유하고 있다. 상법 개정안 적용을 받으면 감사위원 선임 때 행사할 수 있는 의결권은 현대차 3%와 정 부회장 1.74%를 합한 4.74%에 불과하다. 삼성전자(19.58%)를 비롯한 특수관계인 지분이 20.44%인 삼성SDI도 3.86%로 제한돼 투기 자본 경영권 위협에 그대로 노출된다.

SK㈜와 LG전자도 마찬가지다. SK㈜의 경우, 23.4%를 보유한 최태원 회장과 최기원 이사장(7.46%), 최신원 회장(0.01%) 등 특수관계인 지분이 30.89%이지만 최 회장 측이 행사할 수 있는 의결권은 6.03%로 제한된다. LG전자도 대주주 쪽에서 행사할 수 있는 의결권은 3%로 축소된다.

또 집중투표제가 의무화되면 투기 자본은 상대적으로 적은 지분으로 이사 1명을 선출할 수 있다. 주총에서 이사 3명을 선임한다고 했을 때 집중투표제가 없으면 지분 3%씩을 보유한 투기 자본 6곳은 뜻을 같이해도 후보자 1명에게 최대 18% 의결권만 몰아줄 수 있었다. 하지만 집중투표제 하에선 54%까지 행사할 수 있다. 이렇게 되면 투기 자본이 사실상 사외이사 1명 임명권을 가지게 되는 셈이다. 최준선 성균관대 교수는 "이런 상법개정안이 통과되면 단기 차익을 노리는 헤지펀드들이 자기들이 선임한 사외이사를 통해 배당 확대를 요구할 가능성이 크다"며 "국내 기업은 배당 확대냐 투자 확대냐 갈림길에 서게 될 것"이라고 말했다.

상법 개정안대로 '주주대표소송제'가 강화되면 단 1주(株)를 6개월만 보유해도 누구나 회사를 상대로 소송을 제기할 수 있다. 불필요한 소송이 남발될 우려가 크다는 지적이 나오는 이유다. '다중대표소송제'도 투기 자본이 지주회사 지분 1%만 가지면 모든 자회사와 손자회사 이사들을 상대로 주주대표 소송을 제기할 수 있다. 이에 대해 대기업 관계자는 "자회사 임원에 대한 책임 추궁이 필요하면 자회사 주주가 소송을 제기하면 된다"며 "소송 남발로 기업 경영에 부담이 가중되고, 시세 차익을 노리는 투기 자본이 악용할 가능성이 크다"고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