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고 싶은 말 있냐고요? 제 옷을 보시죠"

스무 살 넘은 대한민국 사람이라면 누구나 2002년 여름을 뒤덮었던 붉은 물결을 기억할 것이다. 한국에서 월드컵이 열린 그해 'Be the Reds(붉은 악마가 되어라)' 문장이 새겨진 빨간색 응원 티셔츠는 온 국민의 유니폼이었다. 수많은 사람들 마음을 하나로 모으는 한 줄 문구의 위력은 대단했다.

13일 미국 그래미 상(賞) 시상식에서도 그 어느 때보다 옷에 쓰인 '글자'가 눈에 띄었다. 음악은 물론 메시지의 경연장을 방불케 했다. 가수 조이 빌라의 드레스에는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의 대선 캠페인 구호 'MAKE AMERICA GREAT AGAIN(미국을 다시 위대하게)'과 'TRUMP' 이름이 선명했다. 반면 밴드 하일리 서스펙트는 등에 'IMPEACH(탄핵)'라고 쓴 재킷을 입었다. 힙합 가수 스쿨보이큐는 'GIRL POWER(여성의 힘)'라고 적힌 핫핑크색 후드티 차림으로 어린 딸 손을 잡고 입장했다.

후드 점퍼, 맨투맨 티셔츠 등 최근 패션계에선 10대 청소년이 입을 법한 '유스 컬처(Youth Culture)'가 세대를 넘나드는 인기를 끈다. 단순하고 캐주얼한 패션에 잘 어울리는 장식 요소로 글자가 적극 활용된다. 독특한 글씨 디자인으로 시각적 아름다움을 주거나 별 뜻 없는 단어를 적어넣어 이미지를 전달한다. 최근엔 가치관이나 정치적 견해까지 노골적으로 담아내는 추세다.

작년 영국 브렉시트와 미국 대선을 계기로 더욱 불이 붙었다. 가수 리한나와 레이디 가가, 배우 대니얼 크레이그, 콜린 퍼스 같은 유명 인사들이 'I'm with her(나는 힐러리와 함께한다)' 'I'M IN(EU 잔류 지지)' 등 정치적 슬로건을 내건 티셔츠를 입었다. 일부러 거리를 활보하며 파파라치에게 찍히거나 소셜미디어에 인증샷을 올렸다.

자기 생각을 위트 있고 트렌디하게 표현하는 하나의 방식이 된 '슬로건 패션'은 일반 패션 브랜드에도 반영되고 있다. 디올 역사상 첫 여성 크리에이티브 디렉터가 된 마리아 그라치아 치우리는 'WE SHOULD ALL BE FEMINISTS(우리 모두 페미니스트가 되어야 한다)'는 문장을 티셔츠 한복판에 담아내 단숨에 존재감을 각인시켰다. 정욱준의 브랜드 준지는 이번 겨울 'GENDERLESS(성 구분 없는)' 'BOUNDARYLESS(경계 없는)' 같은 단어를 머플러에 커다랗게 써넣기도 했다.

'슬로건 패션'의 시작은 1960~1970년대 히피 문화다. 반전, 평화, 환경보호 등 저항 정신을 티셔츠에 담아내던 시절이다. 최근 다시 열풍이 부는 데는 소셜미디어 영향이 컸다. 때론 재치 넘치는 촌철살인으로, 때론 문학적 감성을 담아 생각을 짧은 글로 압축해 옷으로 입고 인증 샷을 올리는 것만큼 확실한 표현 방법은 없다. 소셜미디어에서 매력적으로 보이기 위한 '허세의 조건'에 돈이나 희귀한 경험은 물론 윤리적이고 정의로워 보이는 가치관 역시 필수로 포함되는 시대다.

1980년대 영국의 캐서린 햄넷이 '올해의 디자이너상'을 받아 마거릿 대처 당시 총리를 만나는 자리에 '58% DON'T WANT PERSHING(국민 58%는 퍼싱 미사일 반대)'이라고 쓴 티셔츠를 입고 간 것은 유명한 일화다. 하지만 훗날 그는 '슬로건 패션'의 실효성에 대해선 회의적 입장이 커졌다고 한다. "입는 사람이 실제로 아무 행동을 하지 않았는데도 마치 어떤 행동을 한 것처럼 느끼게 한다"고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