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자여, 대담한 '핑크'를 휘감아라

요즘 백화점은 별별 핑크의 전시장 같다. 발레슈즈 색부터 진달래색까지 갖가지 종류의 분홍이 봄을 지배할 컬러로 떠올랐다. 특별한 디자인이나 무늬, 배색도 없이 오로지 핑크만을 내세우는 원피스, 코트, 정장, 운동복이 곳곳에 걸려 있다.

올봄 국내 50대 브랜드 신상품 컬러를 분석한 롯데백화점은 핑크가 가장 유행할 것이란 전망을 내놨다. 손을경 MD전략담당 상무는 "심리적으로 위축된 분위기를 전환할 수 있는 활기 넘치는 색"이라고 설명했다. 지난 주말엔 SBS와 KBS1 메인 뉴스 여성 앵커들이 강렬한 핫핑크색 정장을 입고 뉴스를 진행하기도 했다.

 

최근 몇 년간 핑크는 성(性) 경계를 허무는 '젠더리스(genderless)'의 상징이었다. 분홍색 옷을 입은 남자는 파격적이고 세련되며 유행을 선도한다는 평가를 받았다. 올봄엔 다시 여자의 색으로 돌아온다. '소녀 취향'이라 놀림 받을까 머뭇거리던 성인 여성들이 대담하게 핑크를 입기 시작한 것이다.

영화 '금발이 너무해'(2001) 주인공 엘 우즈는 머리끝부터 발끝까지 핑크로 빼입기를 즐기는 '핑크 공주'였다. 하버드 로스쿨에 합격한 애인이 "이젠 진지한 사람을 만나겠다"며 이별을 선언하자, 우즈는 애인을 되찾기 위해 열심히 공부해서 하버드 로스쿨에 합격한다. 하지만 입학 첫날부터 핑크색 옷을 입었다는 이유만으로 칙칙한 하버드생들에게 무시당한다.

영화는 많은 사람이 핑크에 대해 갖고 있는 이미지를 잘 보여준다. 지나치게 달콤하고 과도하게 여성스럽다. 유치하고 미성숙하다는 느낌까지 더해진다. 적어도 진지하거나, 지성과 교양을 상징하는 색은 아니다. 이런 이유로 성인 여성 중에는 핑크색 옷차림을 유독 꺼리는 사람이 많다.

올 봄·여름 의상을 선보이는 패션쇼에서 여러 유명 브랜드가 이런 고정관념에 반기를 들고 나섰다. 에르메스, 보테가 베네타, 발렌티노, 셀린, 발렌시아가 등 명품 브랜드는 물론 길거리 패션 유행을 이끈다는 베트멍까지 일제히 강렬한 분홍색 의상을 내놨다. 온몸을 휘감는 간결한 디자인으로 핑크가 주는 느낌을 극대화했다.

남자 같은 여자와 여자 같은 남자, 캐주얼한 길거리 패션, 편안한 운동복 차림은 지금도 패션계 최대 화두다. 그런데 왜 갑자기 여성성의 명백한 상징인 핑크가 유행하는 걸까. 올봄 핫핑크색 트렌치코트와 니트 원피스를 선보인 디자이너 마이클 코어스는 "이번 시즌 핑크는 힘과 관련돼 있다"며 "요즘 여성들은 강한 힘, 독립성과 여성스러움을 모두 느끼기 원한다"고 해석했다. 뉴욕패션기술대학 발레리 스틸 박물관장은 "21세기에 핑크는 반어적 의미로 자주 사용된다"며 "현재 핑크의 유행은 핑크 자체에 대한 것이 아니라 핑크가 가진 여성스럽고 예쁜 이미지를 갖고 노는 것"이라고 했다.

'금발이 너무해' 우즈는 하버드대에서 갖은 수모를 겪으면서도 핑크를 포기하지 않는다. 영화 마지막에 결국 핑크 정장을 입고 재판에서 승리를 거둔다. 우즈에게 핑크는 애인에게 잘 보이기 위한 색이었지만, 극이 진행될수록 자기 고유의 취향이자 당당한 정체성으로 의미가 바뀌어 간다.

색채 전문 회사 팬톤에 따르면 핑크는 의외로 다양한 피부톤과 조화를 이루며 피부색을 돋보이게 해준다. 얼굴색이 까무잡잡할수록 강렬한 핑크가 더 잘 어울린다. '핑크 초심자'에게는 회색이나 모래색이 살짝 섞인 듯한 탁한 분홍이 무난하고도 적절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