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간은 사랑의 '숙주'… 사랑이 시키는 대로 사는 것

사랑은 살아 있다. 사랑은 생물이고, 생애가 있으며, 고로 죽기도 한다. "사랑은 신비스러운 것이죠. 사람이 꼼짝할 수 없잖아요. 사랑이 인간을 숙주처럼 부리고 있는 건 아닐까 생각하게 됐어요. 꿈을 꾸고 싶어 꾸는 게 아니라, 꿈이 떠오르면 어쩔 수 없이 계속 그 꿈을 꾸게 되듯이." 5년 만의 장편 '사랑의 생애'(예담·작은사진)를 내놓은 소설가 이승우(58)씨가 말했다.

무작위적인 사랑의 틈입으로 연인은 탄생하고, 울며불며 신체가 이상해진다. 이 과정에서 인간(숙주)은 어떤 주체적 역할도 하지 못한다. 소설에 '깨달아졌다' 등의 피동태가 많은 이유다. "이번엔 특별한 사연이 아니라 에세이 쓰듯 보통 사람의 내면과 현상을 열어보고자 했어요." 플롯이랄 것도 없다. 다만 남녀가 만나 사랑하고 헤어지는 건조한 과정이 작가 특유의 철학적인 문체를 만나 깊이를 얻는다. 주제와 전지적 작가 시점의 서술 방식 등이 유명 소설가 알랭 드 보통을 떠올리게 할 법도 하다. "출판사 편집자도 그런 얘기를 하더군요. 제가 보기엔 밀란 쿤데라와 비슷한 것 같아요. 인물의 행동 기원을 옛 고전에서 끌어오면서 젠체하는."

등장인물엔 작가가 투영돼 있다. 이 소설 속 남자는 대개 미덥잖다. 사랑에 어리숙하고, 때로 속물적이다. "남자들이 하는 사랑은 왠지 진짜 사랑 같지 않죠. 다른 많은 욕구에 사로잡히잖아요. 다만 여자는 사랑을 할 줄 아는 존재라는 생각을 예전부터 해왔어요. 나는 남자이고 여자를 모르니까 환상일 수도 있겠지만요."

그의 이론에 따르면, 소설가는 영감의 숙주다. 단상이 그를 찾아오면 즉시 수첩을 펼쳐야 한다. 이번 소설도 메모에서 탄생한 것이다. 2008년 낸 창작 노트 '소설을 살다'에서도 "소설을 쓰려면 수첩을 뒤져야 한다"고 말한 적이 있다. "날아가 버리기 전에 평소에 보고 들은 것을 다 수첩에 적어놔요. 주로 몰스킨 수첩을 썼는데, 요샌 스마트폰에다가 기록하죠." 그는 '프란츠 카프카는 세 번 결혼하고 세 번 이혼했다'는 사실을 수첩에 쓴 적이 있다. "결혼이 얼마나 어렵기에 그랬을까요? 결혼은 연애의 끝이고 사랑의 무덤으로 알려져 있죠. 소설 속 상황을 전복시켜서 의문을 던져봤어요." 연애지상주의자 남성이 혼전순결주의자 여성을 만난 까닭에 거듭하는 좌절. 이런 경우 결혼은 정열의 종착이 아니라 시발이 된다. "결혼은 제도다. 그러나 제도가 꼭 나쁜가? 제도의 도움을 받기도 하면서 사랑은 생애를 이어갈 수 있다." 그는 5년 연애 끝에 1989년 결혼했다.

그런 그를 프랑스가 열렬히 사랑한다. 본지 동인문학상 심사위원이기도 한 그는 2000년 프랑스의 세계적 문학상 페미나상 외국문학 부문 최종심에 올랐고, 2009년 한국 소설로는 처음으로 장편 '식물들의 사생활'이 갈리마르출판사 폴리오 시리즈 목록에 올라 카뮈·사르트르 등과 어깨를 나란히 했다. 이번 달엔 2013년 동인문학상 수상작 '지상의 노래'가 디크레센조출판사에서 현지 출간되고, 12일엔 한국인으론 처음으로 브롱(Bron) 도서전에 초청받아 참석한다. "제 소설이 개인주의적이고, 본질의 탐구 쪽에 가깝죠. 습작기에 카뮈·도스토예프스키 등 관념의 형상화를 다룬 소설을 주로 공부해서 그런 것 같아요. 그게 프랑스 사람들 정서에 맞나 봐요."

데뷔 36년, 조선대 문창과 교수직을 겸하면서도 거의 매년 책을 내고 있다. 엄청난 정력이라 할 수 있다. "방학 때는 단편 두 편은 쓴다는 각오로 쓴다." 그는 정용준·김엄지 등 제자들에게 "혹시 내 소설이 이상해지거든 꼭 말해 달라"고 부탁한 적이 있다. "다행히 아직까진 별 얘기가 없네요." 올해 단편집 하나가 또 나온다. "칠순 넘어까지 좋은 글 쓰는 분들이 많지 않아요. 최소한 10년은 계속 쓸 거예요. 쓸 때에만 살아 있는 것 같으니까요." 이 또한 전부 사랑이 시킨 짓이리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