입력 : 2017.03.06 09:55

한 친구는 아흔 노모의 간병인을 '선생님'이라고 부른다. “좀 과하게 부르는 거 아니냐?” 했더니, 아니란다. 선생님으로 부르면 표정부터가 밝아지면서 어머니에게 더욱 정성을 다하는 눈치란다. 직장의 수위 아저씨를 선생님이라고 부르는 후배도 있다. 부르기도, 듣기도 민망하리만큼 사방에서 호칭의 인플레가 심하다는 생각만 했지, 선생님 소릴 좀체 들을 일 없는 사람들이 듣게 됐을 때의 기분은 미처 헤아리지 못했던 나다.

때로 누군가에겐 '선생님'이 얼마나 기운을 북돋워 주는 단어인가를 지난 설에 ‘내 어깨 위의 고양이 밥’이라는 실화 영화를 보고 느꼈다. 헤로인 중독자이자 노숙자 신세가 된 거리의 기타리스트 제임스 보웬은 중독을 치료하던 중 상처 입은 고양이를 만난다. ‘밥’이라 이름 지어 돌보며 고양이를 어깨 위에 얹고 공연하고, 자활을 돕는 잡지도 팔면서 그의 인생은 점점 희망을 향한다. 마침내 중독을 벗어난 날, 그간 도와주던 복지사에게 그는 이렇게 말한다.

“잡지를 팔고 있는데 어떤 남자가 다가왔어요. 나랑 말 섞을 일이 없는 잘 차려입은 남자였어요. 그 사람이 나더러 ‘선생님’이래요. ‘선생님, 사진 좀 찍어도 될까요?’ 선생님 소릴 들어본 건 처음이에요. 다 밥 덕분이죠. 밥이 내 삶의 가능성을 보여줬어요. 반대편 세상을요.” 사진을 찍은 사람은 출판 대리인이었고, 그의 제의로 ‘길 고양이 밥(A Street Cat Named Bob)’이 출간됐다. 이 책은 나오자마자 25만 부가 팔리며 영국의 논픽션 부문 1위를 차지한대 이어 18개 언어로 번역됐다.


나, 다니엘 블레이크

사진=조선일보DB
제임스가 '선생님', 즉 'Sir'라는 말을 그냥 들은 건 아니다. 고양이 한 마리에 정을 붙인 채 중독을 끊어내기 위해 홀로 발버둥친 끝에 들은 한 마디였다. 나는 사랑받을만한 가치가 있는 소중한 존재이고, 어떤 성과를 이루어낼 만한 유능한 존재라는 믿음, 곧 자존감을 되찾게 한 단어이기도 했다. 되찾기도 어렵지만 지키기 또한 절대 쉽지 않은 게 자존감인 것 같다. 나이 들고, 실직하고, 병들었을 때는 더욱 그렇다. 설에 본 또 한 편의 영화인데, 황금종려상에다 15분 기립박수까지 받았다는 ‘나, 다니엘 블레이크’에서 절감한 점이다.

목수 다니엘 블레이크는 심장병으로 일을 그만두고 실업급여로 살아야 하는 처지가 된다. 그런데 그 신청부터 사실 증명과 자격인정까지 전 과정은 그에게 모욕과 비참함을 느끼게 한다. 직접 가도 소용없고 몇 시간씩의 신호대기 음을 견뎌야 하는 전화로써만 가능한 신청. 사람의 목소리로 경청해주지 않고 기계적으로만 대하는 상담자. 컴맹에게 인터넷으로만 제출하라는 서류들. 인내심이 한계에 달한 그는 실업수당을 포기하겠다며 말한다. “사람이 자존심을 잃으면 다 잃은 거요.” 그리고 관공서 외벽에 스프레이로 대문짝만 하게 ‘나, 다니엘 블레이크는…’으로 시작하는 자기주장을 쓴다.

여기서 자존심이라고 번역된 자막은 자존감으로 바꾸는 게 더 맞을 것으로 보인다. 앞서 언급한 대로 내가 소중하다고 생각하는 마음이 자존감이라면, 자존심은 내가 잘났다고 생각하는 마음으로 구분되기 때문이다. 어렵게 다시 기회가 돌아온 질병 수당 재심사를 위해 다니엘이 적어놓은 항소 변론은 그의 자존감 선언이나 마찬가지였다. 하지만 갑작스러운 심장마비로 죽음에 이르고, 그 선언은 그의 장례식에서 유언처럼 낭독된다.

“나는 고객도, 사용자도 아니다. 나는 게으름뱅이도, 사기꾼도, 거지도, 도둑도 아니다. 나는 보험번호 숫자도, 화면 속 점도 아니다. 난 묵묵히 책임을 다해 떳떳하게 살았다. 나는 굽실대지 않았고, 이웃이 어려우면 도왔다. 자선을 구걸하거나 기대지도 않았다. 나는 다니엘 블레이크, 개가 아니라 인간이다. 인간적 존중을 요구한다. 나, 다니엘 블레이크는 한 사람의 시민,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니다.” 나는 존중받을 존재임을, 그렇게 노력하며 살아왔음을 이보다 더 명확하게 말할 수 있을까. 이 땅에도 이런 다니엘들이 좀 많을까.


정신은 물론 육체까지

‘빅 미(Big Me)’와 ‘리틀 미(Little Me)’란 영어가 떠오른다. 나를 대단한 존재로 과대평가하는 것이 ‘빅 미’이고, 나만 특별한 것은 아니라며 자신을 낮추는 것이 ‘리틀 미’라고 한다. 다니엘은 그 사이에 있었지 않나 싶다. 나이 먹어가며 ‘빅 미’는 어쩔 수 없이 줄어들기 마련이다. 그 빈자리에 자존심이 치고 올라와서 ‘꼴통’이니 ‘꼰대’니 ‘노욕’ 같은 부정적 꼬리표가 붙기에 십상이다. 자존심 대신 자존감을 갖추고, 나만큼 남도 소중하다는 생각에서 겸손까지 더한 ‘리틀 미’가 늘어나는 노년이라면 얼마나 멋질까.

근래 들어 인문학이 뜨고 있지만, 인문학이 별건가. 혹 잃었을지 모를 자존감을 ‘빅 미’와 ‘리틀 미’ 사이에서 일깨워주는 것으로 생각한다. 미국에서 자선단체의 한 목사가 걸식자들에게 인문소양을 교육했다. 그들의 삶에 무슨 소용이 있겠느냐는 만류에도 문학과 역사, 철학의 인문학만이 아니라 연극과 영화, 소설까지 가르쳤다. 3년간 계속되면서 그들은 하나둘 자립의 길을 찾아 나가고, 다시는 밥을 얻어먹는 줄에 서지 않았다고 한다. 우리나라에서도 어느 신부가 그런 교육을 통해 노숙자들을 새 삶으로 이끌어 관심을 끈 바 있다.

죽을 때까지 너나없이 자존감을 지니고 살면 좋겠다. ‘내 어깨 위의 고양이 밥’에서 제임스는 '선생님'에 자존감이 촉발됐다. ‘나, 다니엘 블레이크’에서 다니엘은 자존감 선언을 했고, 영화 관람자들의 자존감 또한 새롭게 했다. 노숙자들은 인문학을 접하고 자존감을 되찾았다. 그렇듯 나도 다만 전력을 다해야 할 뿐이다. 정신은 물론이거니와 육체까지도 그럴 수 있다면 정말 좋겠다. 100세 시대라지만 최근 조사를 보면 85세 이상 중 절반 이하만 정상적인 일상생활이 가능하고, 4명 중 1명은 간병인의 도움 없이 걷기나 식사조차 불가능하다니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