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푸대접 비빔밥, 機內食 완판 메뉴로"

비빔밥이 1997년 대한항공 일반석 기내식에 등장한 지 20년이 됐다. 국제기내식협회(ITCA)는 그해 머큐리상(Mercury Award) 대상 수상작으로 비빔밥을 호명했다. 여객기에 탑승한 비빔밥은 외국인에게 '한식 전도사' 역할을 해왔고 한국 승객이 선호하는 기내식 1위 자리를 지키고 있다. 지난해에만 300만식이 소비됐다.

"머큐리상 출품하느라 영국 런던에서 밤새 준비하던 날이 떠올라요. 벌써 20년이라니. 사실 딜레마이기도 합니다. 비빔밥을 뛰어넘는 기내식 메뉴를 여태 개발하지 못했으니까요."

서울 김포공항 기내식사업소에서 만난 김호석(55) 셰프(Dish Up 그룹장)는 대한항공 기내식 명장(名匠)이다. 비빔밥 개발부터 모든 과정을 지켜봤고 2006년엔 비빔국수로 또 한 번 머큐리상(금상)을 차지했다. "기내식 비빔밥도 조금씩 변해왔다"며 그가 말을 이었다.

"초창기엔 청포묵과 고사리도 넣었어요. 고사리는 유럽에서 기피 음식이라고 해 빠졌지요. 소고기를 먹지 않는 특정 종교 승객에겐 고명으로 닭고기를 얹습니다. 요즘 일반석 비빔밥엔 호박·표고버섯·취나물·참나물·도라지·무나물·시래기 등 나물 7종이 들어가요."

김호석 셰프는 군단장 요리병으로 복무했고 호텔 조리사를 거쳐 1991년 대한항공에 입사했다. 메뉴 개발, 요리, 인력 양성 등 기내식의 모든 것을 경험했다. 비빔밥은 기내에 일본 보온밥통을 실어 일등석에만 제공하다 1997년 일반석에도 진출했다. 밥과 고추장, 용기 등 난관이 많았단다.

"국내에서 햇반은 기내식 비빔밥 수요 덕에 개발된 거예요. 고추장은 작은 컵에 담아내다 튜브로 옮겨갔습니다. 또 밥과 나물을 비비려면 공간이 필요하잖아요. 네모난 용기가 정석이던 시절에 둥근 용기를 개발했지요."

어설픈 한식을 내놓을 수는 없었다. 면이 불지 않게 하는 조리법으로 비빔국수 메뉴를 히트시킨 김 셰프는 2009년 '메뉴 스터디'라는 기내식 연구 모임을 만들었다. 셰프 8명이 정기적으로 모여 신메뉴를 선보였는데 연간 100종 이상이 나왔다. 대한항공은 곤드레밥, 낙지덮밥, 동치미국수 등 새로운 기내식을 꾸준히 내놓고 있다. 그는 "과거에 비빔밥은 한식 대표는커녕 푸대접을 받는 음식이었다"며 "기내식으로 사랑받고 자연식이 뜨면서 덩달아 '신분'이 상승했다"고 말했다.

기내식의 생명은 안전성과 위생이다. 김 셰프는 "조리한 지 45분 이내에 담아 5도 이하로 급속 냉장하고 차가운 음식은 48시간 안에, 뜨거운 음식은 72시간 안에 소비돼야 한다"며 "기내 오븐으로 재가열할 땐 메뉴별로 온도와 시간이 다 다르다"고 설명했다. 건조하고 기압이 낮은 지상 10㎞ 기내에서도 음식 고유의 맛과 향을 유지하는 데 신경 쓴다.

그는 "한국인에겐 고추장과 나물에 대한 본능적 욕구가 있다"고 말했다. 미주 노선은 승객의 60%, 유럽 노선은 75%가 비빔밥을 찾는다는 통계가 있다. 귀국편에서 비빔밥이 동나 못 먹었다는 불평도 들린다. 탑승객 국적 비율 등 자료를 바탕으로 수요를 예측하지만 쉽지 않단다.

김 셰프는 집에서도 주방 담당이다. 그날그날 냉장고를 열어 '메뉴엔 없는 음식'을 즉흥적으로 만든다고 했다. 외국 항공사 기내식까지 납품하면서 형태와 색깔을 관찰하고 만들고 먹어보는 게 다 공부라고 했다. 장차 개발하고 싶은 기내식 메뉴는 뭘까.

"인도 음식을 한식에 접목할 거예요. 우리 전통을 지키면서 카레를 살짝 응용한 메뉴가 될 겁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