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연급 조연으로 빛난 원로 배우]
이순재, 주인공 돕는 선배 화가… 신구, 극 이끄는 섬뜩한 인물
박인환은 고난도 액션까지
"주 관객층 연령대 높아지며 캐릭터 다양화, 바람직한 현상"
그냥 '감초 조연'이라고 말하면 섭섭하다. 고희(古稀·70세) 지나 희수(喜壽·77세)도 훌쩍 넘긴 원로 배우들이 최근 우리 영화 스크린을 빛내고 있다. 양념처럼 얹힌 주변 배역이 아니라, 당당한 주연급 조연 캐릭터로 등장해 이야기 흐름을 좌지우지한다. 주 관객 연령대의 이동, 더 다양한 영화에 대한 요구, 노년층을 대하는 사회 분위기의 변화 등이 반영된 현상이기도 하다. 독립영화 '아티스트: 다시 태어나다'의 이순재(82), 추리 스릴러 '해빙'의 신구(81), SF액션물 '루시드 드림'의 박인환(72)…. '꽃보다 영화 할배' 세 배우의 활약이 특히 눈에 띈다〈그래픽〉.
◇뜨거움과 차가움 사이의 균형
많은 좋은 영화가 혈기와 연륜의 조화로 깊은 인상을 남겼다. 멀리는 '양들의 침묵'(1991)에서 살인마와 수사관으로 만난 앤서니 홉킨스와 조디 포스터가 있었고, 가깝게는 '인턴'(2015)에서 은퇴 경영자와 벤처 기업인으로 만난 로버트 드니로와 앤 해서웨이, '로스트 인 더스트'(2016)에서 은행 강도와 베테랑 보안관으로 만난 제프 브리지스와 크리스 파인이 있었다. '아티스트…'에서 우리나라 최고 권위의 화가 '중식'으로 출연한 이순재에게 젊은 화가 '지젤'(류현경·34)은 "엄청 과대평가된 거 아시죠? 부끄러운 줄 아세요!"라며 도발한다. 하지만 그는 그저 쿨하게 웃어넘기고, 오히려 젊은 그녀가 예술가로서 자신을 찾도록 돕는다. 신인 김준성(33) 감독의 아이디어와 패기가 돋보인 SF물 '루시드 드림'에서는 배우 박인환이 왕년의 건달이자 실버 심부름센터 해결사로 등장한다. 자동차 열쇠 하나로 프로 암살자를 쓰러뜨리는 고난도 액션 연기도 선보인다.
영화 평론가 동국대 정재형 교수는 "원로 배우들의 약진은, 극장의 주 관객층 연령대가 갈수록 높아지는 인구적 변화와도 맞물려 있다"고 분석했다. CGV 리서치센터에 따르면, 2007년 5.3%에 불과했던 45세 이상 중장년층 관객 비중은 2010년에 10%를 넘어섰고, 2016년에는 20%까지 늘었다.
◇실버 배우, '캐릭터'를 찾다
추리 스릴러 '해빙'이 '로건'과 '콩: 스컬 아일랜드' 등 외화가 이끄는 요즘 박스오피스에서 꿋꿋이 우리 영화의 자존심을 지키고 있는 데는 배우 신구의 역할이 크다. 이혼남 추리광 의사 '승훈'(조진웅)이 흘러든 지방 소도시 정육점 식당의 치매 노인으로, 극 전체를 관통하는 미스터리의 열쇠와 같은 인물. 수면 마취 중에 무심하게 "몸통은 동호대교, 팔다리는 한강대교…" 같은 연쇄살인 사건의 단서를 흘린다. 배우 신구가 아니라면 선뜻 개연성을 갖기 어려웠을 것 같은 공포스러운 캐릭터다. 강유정 영화 평론가는 "과거 우리 영화에서 원로 배우들은 기능 없이 무늬만 남은, 나이에 따라 주어지는 단순한 할아버지·할머니 역할인 경우가 많았지만, 최근 들어 자신만의 중요한 캐릭터를 갖고 등장하는 경우가 늘고 있다"고 했다.
'아티스트…'의 이순재는 대선배 화가이자 아버지적 존재이지만, 동시에 권위를 독점하고 결정을 내리는 '갑(甲)' 성격의 캐릭터이기도 하다. '해빙' 신구의 경우 '속을 알 수 없는 섬뜩한 눈빛의 노인'이라는 캐릭터가 노인층을 바라보는 젊은 층의 막연한 두려움을 무의식적으로 반영한 것으로도 해석될 수 있다. 정재형 교수는 "반항하고 싶은 권위를 쥔 결정권자, 믿고 기댈 수 있는 대선배, 두려움의 대상 등 다양한 캐릭터를 원로 배우에게 부여하는 것 자체가 우리 영화의 다양성, 신·구 앙상블이라는 점에서 바람직한 현상"이라고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