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중의 분노 업고… '법정 드라마' 봇물

"세상은 우리를 버리지 않아."

납치됐던 딸을 되찾은 검사 박정우(지성)가 울먹이며 말한다. 납치범은 대기업 차명그룹의 차남 차민호(엄기준). 쌍둥이 형을 살해하고 형인 척 연기하며 살아가던 차민호는 자신의 정체를 눈치 챈 박정우가 수사망을 좁혀오자 그의 아내를 죽이고 딸을 납치한다. "딸을 살리고 싶으면 네가 가족을 죽였다고 자백하라"는 차민호의 협박으로 하루아침에 사형수가 된 박정우는 탈옥 후 그를 함정에 빠뜨려 딸을 구출해낸다. 페이퍼컴퍼니 설립 혐의로 검찰에 긴급 체포됐던 차민호는 박정우가 재심을 신청하면서 살인사건의 진실까지 세상에 탄로 날 위기에 처한다.

◇'법드'의 공습

종영까지 4회를 앞둔 SBS 월화드라마 '피고인'(SBS)이 지난 7일 자체 최고 시청률 24.9%(닐슨코리아)를 기록하며 뜨거운 인기를 모으고 있다. 재벌의 협박과 회유에도 정의를 지키려다 함정에 빠진 검사 출신 주인공이 자신의 무죄를 입증해간다는 줄거리다. 선인·악인의 숨 가쁜 지략 대결과 긴장감 넘치는 전개, 주인공 지성의 열연으로 흥행에 성공했다.

'피고인'을 필두로 올 상반기 법정 드라마가 줄줄이 방영을 앞두고 있다. '피고인' 후속으로는 지성의 실제 아내 이보영과 이상윤이 주연으로 나서는 '귓속말'(SBS·3월 27일부터)이 방송된다. 조승우와 배두나가 각각 3년, 7년 만에 TV로 복귀하는 '비밀의 숲'(tvN), 지창욱·이성경 주연 '이 여자를 조심하세요'(SBS·5월), 김영광·이시영 주연 '파수꾼'(MBC·5월)도 법정 드라마다. 이종석·수지 주연 '당신이 잠든 사이에'(SBS)와 박신양의 '동네 변호사 조들호' 시즌2 역시 올해 안에 선보일 예정이다. 작년 KBS·MBC·SBS 등 지상파 3사와 tvN이 한 해를 통틀어 선보였던 법정 드라마가 총 5편이었던 것과 비교하면 가히 '법드의 공습'이라 부를 만한 편성이다.

◇방송가에 부는 '분노 상업주의'

법정 소재 정극(正劇)의 부상엔 정·재계 유착 관계 등 부패한 현실과 혼란한 시국이 반영돼 있다. 지난 몇 달간 탄핵 정국에서 재판관과 검사, 재벌이 등장하는 법조계 뉴스에 끊임없이 노출된 시청자들이 어느 때보다 법정을 배경으로 한 이야기에 관심을 보이고 있기 때문이다. 법정 드라마는 '부패 권력과의 쟁투'와 '정의 실현'이라는 서사적 전형을 따르면서 추리·로맨스·코믹 같은 코드를 버무려 작품 전체 색깔을 결정한다. 시청자는 '결국 정의가 승리한다'는 권선징악 귀결에서 대리 만족을 얻게 된다.

정치 검찰과 재벌의 횡포를 다루며 대중의 분노를 자극했던 이른바 '분노 상업주의' 흐름은 영화계에서 먼저 불었다. '아수라' '마스터' '더 킹' '재심' 등 검사나 변호사를 내세워 불의에 대한 분노를 상업적으로 풀어내는 작품이 줄줄이 개봉했다. 이 흐름이 방송계로 넘어왔다는 분석이다.

시청자들이 뉴스나 영화와 비슷한 소재를 다루는 드라마에 피로감을 느낄 수 있다는 우려도 나온다. 한 지상파 PD는 "상반기 법정 드라마의 공격적 편성은 이른바 '최순실 사태'를 통해 불의를 목도한 시청자들의 관심을 흥행과 결부시키려는 목적"이라며 "진부한 선악 대결만 보여주거나 메시지 없이 공허한 감정적 쾌감에만 의존한다면 흥행이 어려울 것"이라고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