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자의 취향, 부엌 풍경을 바꾸다

공무원 정제훈(30)씨는 결혼 이후 줄곧 요리를 전담하고 있다. 오랜 자취 생활을 한 정씨는 요리에 능숙하지만 맞벌이 아내는 관심이 없다. 주말마다 아내와 주방용품 사러 다니는 것이 그의 취미. 정씨는 "요리 좋아하는 친구들끼리 소셜미디어에 사진을 올리며 '장비 경쟁'도 벌인다"고 했다.

회사원 정수원(54)씨는 이틀에 한 번꼴로 퇴근 후 가족의 저녁 식사를 준비한다. 평소 요리에 관심을 가져오다가 직장 일이 줄어든 3년 전부터 본격적으로 부엌에 들어갔다. 아내가 쓰던 조리용품이 불편하고 마음에 들지 않아 최근 주물 프라이팬과 칼 세트 등 주방용품 쇼핑에도 나섰다. 그는 "직접 고른 주방 도구를 사용하면 아내의 영역으로 규정됐던 부엌이 어색하지 않게 느껴진다"고 했다.

1인 가구 자취생부터 가족을 위해 요리하는 아빠까지 부엌으로 들어가는 남성들을 쉽게 볼 수 있는 시대다. '집밥 백선생'(tvN) '살림하는 남자들'(KBS2)처럼 요리하는 남성을 내세운 예능도 흔해졌다. 남성이 스스로 취향과 필요에 맞게 주방가구와 도구를 직접 사들이면서 부엌 풍경도 바뀌어 가는 중이다.

홈 인테리어 업체 한샘에 따르면 부엌 조리대 기본 높이는 1990년대 85㎝에서 최근 87.2㎝로 높아졌다. 조절 장치를 이용해 2㎝ 더 높일 수도 있다. 88~90㎝는 키 170㎝ 넘는 사람이 쓰기 편한 높이다. 한샘 관계자는 "여성 평균 신장 상승은 물론 요리하는 남성이 늘어난 것이 영향을 끼쳤다"고 했다. 부부가 함께 요리하기 위해 싱크대를 2개 설치하는 경우도 늘고 있다. 콘크리트를 연상시키는 마감재나 대리석을 활용해 중후한 느낌을 주는 무채색 부엌 가구도 남성에게 인기다.

요리를 즐기는 남성들은 물품 구매에도 직접 나선다. 인터넷 쇼핑몰 옥션에 따르면 올해 1~2월 주방가전을 구입한 남성은 전년 동기 대비 102% 늘었다. 주방용품(55%)과 주방 잡화(123%)를 구입한 남성도 크게 증가했다. 전기쿠커(174%), 칼(63%), 냄비(56%), 프라이팬(35%)은 물론 수세미·행주(239%)와 고무장갑(132%)을 산 남성도 많아졌다.

남성이 선호하는 주방용품 특징은 일반 제품보다 더 많은 기능을 갖추고 있으면서 사용이 편리한 것이다. 신세계백화점 가전제품 서정훈 바이어는 "바닥 판만 바꾸면 구이·찜·탕 요리를 모두 할 수 있는 냄비, 차가운 샌드위치를 넣으면 빵이 구워져 나오는 간편한 그릴, 대용량 믹서 등을 남성들이 많이 찾는다"고 했다. 특유의 '장비 욕심'도 반영돼 한꺼번에 세트로 구매하는 경향이 여성에 비해 뚜렷하다고 한다.

여성이 쓰기엔 무거운 무쇠, 주철, 두꺼운 스테인리스 재질도 남성들은 선호한다. 잘 눌어붙지 않고 맛 내기 쉬운 데다 투박한 모양새까지 남성들 마음을 끈다. 화산재가 함유된 흙으로 빚어 회색빛이 도는 식기, 뱀가죽 무늬 식기 등 어두운 색상의 묵직하고 고급스러운 디자인도 많이 찾는다. 생활용품 편집숍 '피숀' 오세민 바이어는 "그릇을 피규어 장난감 수집하듯 사 모으는 30~40대 남성도 꽤 많다"고 했다.

몇 년 전 미국 시장조사 전문기관 마이단마케팅은 '맨플루언서(manfluencer)'라는 신조어를 발표했다. 남성을 뜻하는 '맨(man)'과 영향력을 행사하는 사람이란 의미의 '인플루언서(influencer)'를 합친 단어로, 가정에서 식료품 구매와 요리의 절반 이상을 담당하는 남성을 말한다. 여성이 소비 대부분을 차지하던 분야에서 남성의 영향력이 확대되는 현상을 설명하고 있다. 이제 부엌은 여자만의 공간이 아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