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죽다 살아나 마주한 바다… 그 생명의 몸짓을 그립니다"

그날도 그는 작은 보트에 스케치북과 낚싯대만 싣고 샌타모니카 비치를 출발했다. 깊은 우울증에 빠져 있을 때였다. 고기는 잡을 생각 없이 파도에 떠밀려 흘러가는데 돌연 짙은 안개가 덮쳤다. 지척을 분간할 수 없는 상태가 이어지자 공포가 엄습했다. 죽음은 손 닿는 곳에 있었다. 얼마나 시간이 흘렀을까. '아!' 하고 탄성이 터졌다. 안개가 걷히고 눈앞에 색색깔 진주알을 뿌려놓은 듯한 바다가 펼쳐졌다. 파도는 오묘한 빛으로 출렁였다. 단 한 번도 같은 색깔과 몸짓을 되풀이하지 않았다.

재미화가 안영일(83)은 34년 전 여름날을 또렷이 기억했다. 작품을 둘러싸고 10년째 이어진 갤러리와 컬렉터의 송사로 그림 한 점 못 그리고 있을 때였다. 생사의 기로에서 만난 바다가 그를 다시 캔버스 앞에 앉혔다. "이걸 그리기 위해 지금껏 화가로 살았나 하는 생각이 스쳤지요. 물, 아니 생명을 그리기 시작했습니다."

안영일의 '워터(water) 시리즈'가 미국 화단에서 재조명되고 있다. 팔레트 나이프로 일일이 찍어 붙인 사각의 색점들로 화면을 채운 추상 작품이다. 2015년 로스앤젤레스 한국문화원 초대전, 롱비치미술관 초대전에 이어 올해 2월 25일부터 10월 1일까지 미국 서부 최대 미술관인 로스앤젤레스 카운티미술관(LACMA·라크마)에서 생존 한국 작가로는 처음 개인전을 연다. 라크마의 스티븐 리틀 수석 큐레이터는 "안영일의 워터 시리즈는 물의 태곳적 정수를 포착하고 있다"며 "섬세한 기하학적 테크닉, 물에 대한 장엄한 묘사가 빚어내는 긴장감이 역동적이다"고 평했다.

서울에서도 안영일 작품전이 열린다. 1986년 귀국전을 한 서울 사간동 현대화랑에서 다음 달 16일까지 '물' 연작 30점을 선보인다. 3년 전 뇌졸중으로 쓰러졌던 화가는 아내의 부축을 받아 모국을 찾았다. "물의 색깔이 이렇게 다양하냐"는 질문에 노(老)화가는 어눌하지만 정확히 답하려 애썼다. "천만 가지지요. '바다가 푸르다'는 건 이론일 뿐이에요." 나이프를 고집하는 이유는 "칼날의 터치감이 좋아서"라고 했다. 사각의 점들은 햇살이 물에 비칠 때 순간적으로 나타났다 사라지는 생명의 입자들. 점들 사이 삐죽삐죽 튀어나온 여러 색깔 돌기들은 '숨구멍'이랬다. 안영일은 단색화 열풍으로 뒤늦게 국내외 아트페어에서 주가를 높이는 중이지만 정작 화가는 "나는 단색화를 모른다. 그저 물을 그릴 뿐"이라고 했다.

1966년 미국으로 건너가기까지 천재 화가로 촉망받던 청년이었다. 정창섭·윤형근 스승이기도 했던 서양화가 안승각이 부친. 고등학생 때 아버지 캔버스를 뜯어 집 마당 토끼장을 그린 작품을 국전에 내놔 특선을 받았다가 나이가 어리다는 이유로 입선으로 강등됐던 일화는 화단에 유명했다. 서울대 회화과를 졸업한 뒤 전업작가로 나섰다. 당시 주한 미국 대사가 뉴욕 초대전을 주선할 만큼 작품만 팔아도 생계가 가능한 인기 작가였다. LA에 정착해서도 컬렉터들의 열렬한 지지를 받았다. 유명 갤러리 전속 작가가 되어 '우산' '새' '뮤지션' 연작 등 반(半)구상 작품들을 쏟아내던 시절이다. 하지만 시련을 비켜가진 못했다. 작품을 둘러싼 송사, 그로 인한 가정 파탄, 교통사고, 뇌졸중까지. 재혼한 아내 안소라야씨는 "모두들 남편의 화업은 끝났다고 여겼지만, 쓰러진 지 8개월 만에 마비가 덜 풀린 손으로 다시 그림을 그리기 시작했다"고 전했다.

어느 관람객은 안영일 그림에선 음악이 들린다고 했다. 옛 공장을 개조한 작업실엔 그가 연주하는 피아노와 클라리넷, 첼로가 놓여 있다. 드보르자크 첼로협주곡 b단조 악보 위에 물감을 찍어낸 연작도 있다. "그림을 안 했으면 음악가가 됐을 것"이라는 팔순의 화가는 "시렁 가득히 캔버스가 준비돼 있고 내가 원하는 색의 오일 튜브들이 줄지어 놓여 있으면 세상 부러울 게 없다"고 했다. "나의 곳간은 아직 그리고 싶은 영감들로 가득 차 있으니까요." (02)2287-359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