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의와 불의 뒤섞인 혼돈, 그게 세상이야

"미스 슬로운, 파티에 온 것을 환영하네!"

미국 워싱턴 DC의 상원 청문회장. 위원장석의 노회한 상원 의원이 입꼬리를 이죽대며 말했다. 증인석에 홀로 앉은 로비스트 '슬로운'(제시카 채스테인)을 향해 타닥타닥 총격처럼 카메라 플래시가 터졌다. 불법 로비와 약물 남용 의혹을 집요하게 물고 늘어지자 그녀가 "만취해서 법 만드는 상원 의원 나리들이나 각성하라"고 소리치며 폭발한다. 회심의 미소를 짓는 반대파 세력들. 권력자들도 그 앞에 서면 숨을 죽이는 승률 100%의 전설적 로비스트, 오직 슬로운 한 사람을 옭아매려 열린 청문회다. 반대파는 총기규제법 통과를 막기 위해 로비를 이끄는 그녀를 먼저 쓰러뜨릴 셈이다. 한 사람을 갈기갈기 찢어 삼키며 파티를 벌이려는 정치 하이에나들에게 맞서 그녀는 다시 한 번 승리할 수 있을까.

지난 29일 개봉한 '미스 슬로운'은 거대 악에 맞서 싸우는 정의로운 개인에 관한 이야기가 아니다. 선의를 가진 사람들이 힘을 모으면 세상을 좀 더 나은 곳으로 바꿀 수 있다는 희망 따위도 없다. 이 영화는 오히려 정의와 불의가 그렇게 간단히 나뉘지 않는다는 것을 이미 깨달은 '어른'들을 위한 작품이라 할 수 있다. 눈으로 보는 색깔이 3원색의 혼합 비율로 결정되듯 선악이 뒤섞여 총천연색으로 혼란스러운 것이 현실 속 세상이라고 영화는 말한다.

슬로운은 승리를 위해 불법과 합법,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는 로비스트다. 인도네시아산 야자유 수입에 매겨지는 세금을 낮추기 위해 반대파 상원 의원에게 초호화 외유를 선물하며 구슬리는 건 애들 장난에 불과하다. 그가 돈과 권력이 보장되는 초대형 로비 회사를 떠나 총기규제법을 통과시키려는 소규모 초당파 로비 회사로 옮긴다. 총기 규제는 도덕적인 목표지만 이를 해결하려는 슬로운은 독니를 드러낸 뱀처럼 교활해진다. 각성제 약 기운으로 눈을 반짝이는 그녀는 당연한 듯 말한다. "뭔가 맘에 안 들면 직접 바꿔. 그러려고 우리가 여기 있는 거니까." 영화는 청문회 장면과 슬로운의 로비 과정을 번갈아 비추며 롤러코스터 타듯 반전에 반전을 거듭한다.

영화는 미국 정치의 치부에 현미경을 대고 수술하듯 까발리지만, 동시에 세상은 그렇게 쉽게 변하지 않는다는 것도 잊지 않는다. 사악한 거대 악과 선한 개인이라는 식상한 구도를 벗어나지 못했던 최근 몇몇 우리 영화에 좋은 본보기가 될 것이다. 상영 시간 132분, 15세 이상 관람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