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리뷰] 건물 폭발도 연출… 파격의 4시간

'펑!'

건물이 폭파되는 영상과 함께 굉음이 귀를 찌른다. 무대 뒤편은 전체가 대형 스크린. 동시에 무대 오른쪽 벽의 밑부분이 실제로 뚫리면서 태풍같이 거센 바람이 휘몰아친다. 자욱한 연기를 뚫고 잔해물이 무대를 덮었다. 주인공인 하워드 로크가 자신의 이상주의적 신념에 어긋난다며 스스로의 설계물을 폭발시키는 장면이었다. 분명 '연출'인데, 정말 건물이 눈앞에서 무너지는 듯했다.

'충격과 공포.' 더 잘 어울리는 조어(造語)를 찾기 어려웠다. 2일 막을 내린 벨기에 연출가 이보 반 호브(네덜란드 극단 토닐그룹 예술감독)의 4시간짜리 국내 초연작 '파운틴헤드'는 형식과 내용 모두 충격이었다. 무대 폭파라는 자극적 기법뿐만 아니라, 전체주의와 개인주의를 무 자르듯 선악으로 구분할 수 있느냐를 묻는 주제 역시, '불편한 공포'를 관객들에게 심었다. 결과는 사흘 공연 전석 매진과 기립박수였다.

구소련 출신 미국 소설가 아인 랜드(1905~1982)의 동명 소설이 원작. 천재지만 자기중심적인 건축가 하워드 로크와 타협하며 명성을 꾀하는 건축가 피터 키팅이 각각의 세계를 대표한다. 극 후반에는 이타주의라는 이름하에 전체주의를 옹호하는 평론가 엘스워스 투히와 선정적 뉴스로 여론을 조작하는 게일 와이낸드 와이낸드 뉴스 그룹 회장과 대립한다.

여주인공도 문제적이다. 지성·재력·미모를 모두 갖춘 팜파탈 도미니크 프랭컨은 로크와는 사랑이란 이름으로 불륜을 저지르고, 키팅에게는 형식적인 결혼 딱지를 선사하며, 와이낸드에게는 남편 키팅을 출세시킨다는 '거래의 증표'로 몸을 내준다. 이보 반 호브는 로크의 자기변명을 통해 이런 질문을 던진다. 연극을 본 연출가 양정웅은 "대중은 스스로를 개인주의자라고 생각하지만 사실은 어떤 이데올로기에도 쉽게 휘둘린다. 이를 너무나 가감 없이 드러내서 폐부를 찔린 기분이었다"면서 "요즘 우리 모습과도 많이 겹쳐 당장 원작을 사봐야겠다고 생각했다"고 말했다.

우리 무대에서는 보기 어려웠던 실험적·파격적인 무대 기법 역시 기록해야 할 듯하다. 배우가 눈앞에서 설계한 도면이 대형 스크린에 투사된다. 수개월간의 드로잉 연습으로 다져진 건축가 사무실 모습 그 자체다. 주인공 로크는 유명 건축가 프랭크 로이드 라이트의 '낙수장'(1939·미국 펜실베이니아), 루이스 칸의 '트렌턴 배스 하우스'(1955·미국 뉴저지), 렌조 피아노의 '샤드'(2013·영국 런던)를 연상시키는 설계도를 손수 그리는데 이를 바로 알아보는 관람객도 더러 있었다. 남녀 주인공이 무대에서 전라(全裸)로 사랑을 나누는 장면은 관객의 나안(裸眼)뿐만 아니라, 천장 카메라의 눈으로도 스크린에서 볼 수 있다. 실물 크기 신문 인쇄기에선 '따끈한' 신문이 찍혀 나왔다. 클라이맥스는 '공공주택 폭파 장면'. 30t 무게의 장비들은 컨테이너 3대에 실려 왔다. "여러분 만나서 반갑습니다"라는 우리말 깜짝 대사도 있었다.배우 예수정은 "영상을 유연하게 사용한 열린 무대"라면서 "내 상상의 경계를 확장시켜준 행복한 경험이었다"고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