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로벌 환경 규제 반기는 조선업계… "선박 교체 빨라져 발주량 늘어"

때론 규제가 반가울 수도 있다. 지금 조선(造船) 업계가 그 처지다. 극심한 수주난을 벗어나기 위해 몸부림치는 가운데 조선 업체들은 조만간 실행될 규제 두 가지를 기다리고 있다. 하나는 '선박 평형수 처리 장치' 의무화. 전 세계 모든 선박이 오는 9월부터 장착해야 하는 조치다. 다른 하나는 선박 연료 황산화물(Sox) 함유량을 3.5%에서0.5%로 낮춰야 한다는 환경 규제. 2020년부터 들어간다. 1990년대 유조선 이중 탱커(단일 선체에서 이중 선체로 바꾸도록 한 것) 규제 이후 20여년 만에 나오는 선박에 대한 강력 규제들이다. 조선업체들은 이런 글로벌 환경 규제 강화가 노후 선박 교체 시기를 앞당겨 수주난을 극복하는 데 도움이 될 것으로 기대하고 있다.

◇"올 선박 발주량 50% 가까이 증가"

대형 선박은 주로 '벙커C유'를 사용한다. 원유에서 나오는 석유제품 중 품질이 가장 낮다. 이 때문에 연소할 때 휘발유보다 훨씬 많은 질소산화물(NOx)과 황산화물 등 오염 물질을 내보낸다. 선박 1척에서 뿜는 배기가스가 승용차 130대와 맞먹는다고 한다. 자동차 등에서 나오는 육지의 배기가스는 각종 규제를 통해 어느 정도 통제되지만, 선박 배기가스는 아무 제지 없이 매년 급증하고 있다. 2020년이면 선박 배기가스가 유럽 전체 육지 배기가스를 넘어 대기오염의 첫째 원인이 될 것이라는 전망도 있다.

항구도시가 많은 유럽은 선박의 잦은 입항 탓에 항구뿐만 아니라 내륙 도시까지 선박 배출 가스로 인한 대기오염이 심각한 수준이다. IMO(국제해사기구)는 지난 2010년부터 ECA(배기가스 통제 지역인 발틱·북극·북아메리카·미국 카리브해) 지역을 지나는 선박들의 연료 황산화물 함유량을 1.0% 이하로 규제한 걸 시작으로 2015년에는 이를 0.1% 이하로 강화했고, ECA 이외 지역은 2012년부터 3.5% 이하로 규제했다. 여기에 작년 10월 28일 IMO 총회에서 2020년부터 선박 연료 황산화물 함유량을 0.5% 이하로 낮추도록 결정했다.

선박이 IMO 규정을 만족시키기 위해서는 ▲저유황유(MGO·Marine Gas Oil) 사용 ▲탈황기(Scrubber) 설치 ▲배기가스가 거의 없는 LNG를 연료로 하는 선박으로 바꿔야 한다. 문제는 비용이다. 저유황유는 벙커C유보다 50% 넘게 비싸다. 탈황기를 설치하는 데도 500만달러 정도가 들어간다. 또 탈황기는 엔진 성능을 저하시켜 연료 소모가 더 많다는 단점이 있다. 낡은 선박이라면 탈황기를 설치하는 게 경제성이나 효율성 면에서 모두 떨어진다. 저유황유로 바꾸거나 탈황기를 설치하는 것보다 LNG를 연료로 하는 새 선박으로 교체하는 게 길게 보면 경제적이라는 게 전문가들 지적이다. 친환경 선박 기술이 세계 최고 수준인 국내 조선소가 선박 연료 규제를 반기는 이유다.

◇평형수 규제로 40조원 시장 열려

평형수는 선박 무게중심을 잡아주기 위해 사용되는 바닷물이다. 화물을 선적하면 싣고 있던 바닷물을 내버리고 화물을 내리면 다시 집어넣어 균형을 잡는다. 수만 척의 선박이 전 세계 항구를 돌아다니다 보니 평형수에 해로운 세균이 섞여 해양 생태계를 교란시키는 주범으로 꼽혀왔다. IMO는 평형수로 인한 해양 생태계 교란을 막기 위해 2004년 평형수관리협약(BWMC)을 만들었다. 30개 이상 국가가 비준하고, 이 국가들의 선복량(船腹量)이 전 세계 35% 이상이면 발효된다고 규정했다. 작년 9월 핀란드가 IMO에 협약 동의서를 제출하면서 발효 기준을 충족하게 됐다. 1년 유예 기간을 거쳐 오는 9월 8일부터 발효된다. 이에 따라 모든 선박은 협약 비준국 바다에서 평형수 처리 장치(BWMS·Ballast Water Management System)를 거치지 않은 평형수는 바다에 버릴 수 없게 된다.

새로 건조되는 선박은 건조 과정에, 현재 운항 중인 선박은 5년마다 하는 정기 검사 때 평형수 처리 장치를 설치해야 한다. 2022년이면 모든 선박에 설치된다. 업계에선 선박 규모에 따라 최대 500만달러, 평균 100만~200만달러가 들 것으로 추산한다.

정부는 평형수협약 발효로 앞으로 5년간 40조원 규모 시장이 형성될 것으로 전망하고 있다. 작년 우리 기업들은 1396억원 매출로 시장점유율 1위다. 위기의 국내 조선 기자재 산업에 새로운 돌파구가 될 것으로 기대되고 있다.

◇"발주 증가" 대(對) "당장은 적어"

업계에서는 이런 환경 규제가 수주 절벽을 겪는 조선업에 단비가 될 것으로 기대하고 있다. 선박의 평균 수명은 25년 정도인데 요즘은 좀 더 빨라지는 추세다. 남은 사용 기간이 5년이 안 되는 선박의 경우, 탈황 설비나 평형수 처리 장치를 추가로 설치하는 데 드는 비용이 선박 운용으로 얻을 수 있는 수익보다 크기 때문에 노후 선박 폐기 속도를 촉진할 것으로 기대하고 있다. 평형수 처리 장치의 경우, 선박 연식이 오래될수록 정기 검사 비용이 따라 올라간다. 15년이 넘은 선박은 선령 18년에 중간 정기 검사, 20년에는 정기 검사를 받아야 한다. 두 차례 검사에 약 700만달러가 들게 되고, 여기에 추가로 평형수 처리 장치까지 설치해야 한다. 결국 15년이 넘은 선박은 새 선박으로 바꾸는 게 훨씬 경제적이라는 것이다.

현재 전 세계 선박 중 15년 이상 된 선박 비중은 32.3%다. 선종별로 LPG 운반선 24.9%, 원유 운반선 19.4%, LNG 운반선 16.8%, 석유제품 운반선 16.8%, 컨테이너선 13.4% 정도다. 신한금융투자는 15년 이상 된 선박 중 환경 규제로 10%가 2017년에 선(先)발주한다고 가정하면 올해 전 세계 선박 발주량은 기존 예상치보다 49% 증가할 것이라고 전망했다. 1990년대 IMO가 유조선 이중 탱커 규제를 내놓은 뒤 실제 선박 해체량이 크게 늘고, 이는 신규 발주로 이어졌다. 당시 1992년부터 2003년까지 1.43억DWT(선박 자체 무게를 제외하고, 순수하게 화물을 적재할 수 있는 t수)가 해체됐고, 해체로 인한 운임이 증가하면서 1996년부터 2005년까지 2억7000DWT가 신규 발주됐다. 이강록 교보증권 연구원은 "선령이 20년 이상 된 선박들은 다양한 규제로 교체될 가능성이 매우 높다"며 "환경 규제는 노후 선박 해체 시기를 앞당기고, 이로 인한 신규 발주는 친환경 고효율 선박 기술이 세계 최고 수준인 국내 조선소들 독부터 채울 가능성이 매우 크다"고 말했다.

반면 UBS는 "현재 선박 운항률이 72%에 불과한 상황에서 선령 15년 이상 선박이 5년 이내에 모두 폐선되더라도 2020년 운항률은 75% 수준에 그칠 것"이라며 "(환경 규제로 인해) 단기간 선박 교체 수요는 제한적일 것"이라고 밝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