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 리뷰] 부정당한 과거史… 어째 남일이 아니네

"저는 홀로코스트(유대인 학살)를 부인하는 사람들이나 팝스타 엘비스 프레슬리 생존설을 믿는 사람들과는 논쟁하지 않습니다."

홀로코스트 문제에 정통한 유대인 역사학자 '데버러 립스타트'(레이철 바이스) 미국 에머리대 교수는 1994년 신간 출판 기념회장에서 자신 있게 말한다. 이 자리에 나치의 유대인 학살을 부정하는 영국 극우 작가인 '데이비드 어빙'(티머시 스폴)이 불쑥 나타난다. 어빙은 "히틀러가 유대인 학살을 지시한 증거는 어디에도 없다"며 시비를 걸어온다. 립스타트는 "사실을 두고는 토론하지 않는다"면서 논전(論戰)을 피한다. 어빙은 지폐 다발을 흔들면서 "히틀러가 학살을 지시한 증거를 가져오면 당장 1000달러를 주겠다"고 청중을 선동한다. 2년 뒤 어빙은 립스타트 교수와 출판사 펭귄북스를 명예훼손 혐의로 고소한다.

오는 26일 개봉하는 '나는 부정한다(원제 Denial)'는 립스타트와 어빙 사이에 4년간 계속됐던 실제 법정 공방을 스크린으로 옮긴 영화다. 1996년 어빙은 "립스타트 교수가 저서를 통해 나를 '나치 옹호자이자 히틀러 숭배자, 사실을 왜곡하고 증거를 조작해서 홀로코스트를 부정한 사람'이라고 낙인찍었다"면서 영국 법원에 명예훼손 소송을 제기했다.

이 영화가 독특한 건, 생존 인물들 실화에 바탕을 두고 있다는 점이다. 립스타트는 올해 70세, 어빙은 79세다. 종전(終戰) 70년이 지난 지금까지 홀로코스트를 부인하는 사람들이 있을까 싶다. 하지만 반유대주의와 인종주의에 기반을 둔 유럽 극우 세력은 의외로 뿌리가 깊다. 위안부 문제와 난징(南京) 학살을 부정하는 일본의 역사수정주의 세력을 떠올리면 남의 이야기가 아니게 된다.

립스타트 교수의 영국 측 변호인단은 홀로코스트 생존자들을 증인으로 법정에 세우지 않는 전략을 택한다. 수십 년이 흐른 뒤, 생존자들에게 생길 수 있는 기억의 빈틈을 상대방이 파고들 기회를 주지 않기로 한 것이다. 립스타트의 변호인단은 아우슈비츠 수용소를 직접 둘러보면서 법정 질문을 준비한다.

법정에서도 립스타트의 변호인 '리처드 램프턴'(톰 윌킨슨)은 아우슈비츠 가스실의 존재와 용도에 대해 날카로운 질문을 퍼붓는다. 어빙은 "시신 소독용"이나 "공습 대피소"라는 궤변을 늘어놓지만, 앞뒤가 맞지 않는 횡설수설에 논리적 허점이 드러난다. 영국 법원은 장문의 판결문(334쪽)을 통해 "어빙이 2차 대전 당시 역사적 기록을 체계적으로 왜곡했다"면서 립스타트의 손을 들어줬다.

지금 이 영화를 보아야 하는 관객이 있다면 과거사를 왜곡하고 전쟁 책임을 부인하기에 바쁜 일본 역사수정주의 세력일 것이다. 우리에겐, 덮어놓고 목소리만 높이는 식의 감정적 접근보다는 치밀한 역사 검증과 논리적 대응이 필요하다는 교훈을 전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