쉰넷에 떠난 한국화 자유혼, 연희동 옛집에 깃들다

"밀가루로는 빵만 만드는 것이 아니라 국수나 수제비도 만든다."

정제된 그림은 재미가 없어 내키는 대로 화흥(畵興) 따라 그렸다는 황창배(1947~2001)는 이른바 '밀가루 수제비론'을 펼치며 1980~1990년대 미술계에 파란을 일으킨 인물이다. 동양화에 아크릴과 파스텔, 흑연 가루와 연탄재를 두껍게 올리는가 하면, 낙서처럼 해학을 가득 담아 캔버스를 유희했다. '한국화의 테러리스트' '무법(無法)의 자유주의자'로 불린 그는 30대에 '황창배 신드롬'을 일으켰고, 와인 TV CF 모델로도 나서 대중에게 얼굴을 알린 스타 작가였다.

쉰넷, 담도암으로 눈감는 순간까지 파격과 일탈을 멈추지 않았던 이 걸출한 작가를 기리는 공간이 11일 서울 연희동에 개관한다. 16주기를 맞아 유족과 그의 지인들이 뜻을 모아 여는 '스페이스 창배'다. 고인의 아내 이재온(64)씨는 "2년 전 동료 화가들과 제자들이 마련한 '우리다움을 고집하던 황창배를 기억하다' 전시가 기념사업회의 불씨가 돼주었다"면서 "남은 식구들이 살고 있던 연희동 집을 5층 건물로 신축해 문화예술 공간으로 꾸몄다"고 밝혔다.

'스페이스 창배'는 전시, 공연, 학술 행사가 열리는 복합문화공간이다. 개관을 기념해서는 황창배 작품 열두 점을 전시한다. "봄은 새로 시작하는 계절이자 생명의 계절이라 남편이 그린 화사한 꽃과 수풀, 알이 형상화된 작품을 모아봤어요." 전시작의 대부분은 황창배가 1991년 이화여대 교수직을 박차고 충북 괴산 산골짜기에 내려가 칩거하면서 그렸던 그림들이다. "남편이 제일 좋아하는 찬송가가 '참 아름다워라 주님의 세계는…'이었어요. 자연을 보며 하나님 이상의 예술가는 없다고 입버릇처럼 말했지요."

1970년 서울대 회화과를 졸업한 황창배는 1978년 대한민국미술전람회에서 대통령상을 수상하며 혜성처럼 등장했다. 한국화 분야 최초의 대통령상 수상인 데다, 알의 탄생을 형상화한 비구상 작품이라 화단이 떠들썩했다. 스타 작가가 되고 나서도 수묵과 채색의 이원화 구도를 허물고 시대의 부조리와 불편한 사회상을 풍자하는 등 파격을 시도해 '현대 회화의 전위'로 불렸다. 인체를 로봇처럼 구현하거나 내장을 드러낸 물고기, 장닭을 우스꽝스럽게 묘사한 그림은 유명하다. 특히 장닭 화면 속에 닭의 울음소리를 '哭高宅(곡고택: 부잣집을 곡한다)'이란 한자로 표기, 부잣집 마나님들 허영심에 냉소를 보낸 그림은 장안에 화제가 됐다.

유족과 더불어 '스페이스 창배'를 운영할 황창배기념사업회는 "이 공간이 황창배를 기억하는 장소이자 예술을 사모하는 모든 이들의 사랑방이 되길 바란다"고 했다. 전시 개관식에는 운영위원인 강경구, 금보성, 김복기, 김상철, 김선두, 김호득, 박영택, 오숙환, 이승철, 이종목, 정종미, 홍순주 등이 참석한다. 전시장 건물 1·2층에는 스타 셰프 박준우가 두 달 전 '오트뤼' 디저트카페와 '알테르에고' 유러피언 레스토랑을 열어 연희동 '핫 플레이스'로 떠올랐다. 개관전은 5월 13일까지. (02)2647-178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