평화시장에서 옷 도매상을 하는 지인의 가게를 찾아가려니 딱 두 사람이 오갈 정도의 긴 상가 통로를 지나야 했다. 월요일 오전이라 사람이 뜸할 줄 알았는데 아니었다. 아줌마라기엔 좀 나이가 많고, 할머니라기엔 좀 나이가 적어 뵈는 여자들과 어깨를 부딪치기 일쑤였다. 노소를 막론하고 봄, 여자의 계절이라는 봄이지 않은가. 옷장을 열어보니 “입을 옷이 없네.” 탓에 시장을 찾은 이들인가 보았다. 옷장이 미어터져도 손이 가는 게 없으면 입을 게 없는 것이다. 선택의 폭이 커질수록 결정을 내리기가 힘든 까닭이다.
이를 수치로 확실히 보여준 실험도 있었다. 일전에 미국 컬럼비아대학 경영학과의 한 교수는 고급 식료품가게에서 다양한 잼을 시식해 볼 수 있는 광고 테이블을 마련하고, 소비자들의 구매동향을 살펴봤다. 이쪽 테이블에는 6가지의 잼을, 그 4배가 되는 24가지의 잼은 저쪽 테이블에 진열했다. 물론 소비자들은 24가지 쪽에 더 자주 머물며 시식도 했다. 하지만 구매율은 3%에 불과했다. 반면 6가지 쪽의 구매율은 30%에 달했다.
사과 두 개
옷이나 잼뿐 아니라 매 순간 크고 작은 선택의 연속 선상에서 벗어날 수 없는 게 우리 삶이다. 내 의지와 판단과는 상관없이 선택되는 경우도 부지기수다. 그런데 선택권을 줬을 때는 무엇이든 선택할 여지가 많으면 결정을 고민하게 된다. 그만큼 만족도가 떨어지면서 행복은 덜해지기 마련이다. 그런 상태를 ‘결정장애’니, ‘햄릿 증후군’이라 하고, 선택에 어려움을 겪는 이들을 ‘메이비(Maybe)족’이라고 이름 붙이기도 한다. 그렇지만 둘 중 하나를 고르는 정도로 선택의 폭이 작다 해서 이런 단어들로부터 자유로워지는 것 같지는 않다.
두 개 두 개 사과 두 개 / 언니 한 개 나 한 개
받아들면 작아 보여 / 자꾸자꾸 바꾸지요
두 개 두 개 사과 두 개 / 언니 한 개 나 한 개
초등생 시절 교과서에서 봤던 윤석중 선생의 동시 ‘사과 두 개’를 나는 지금도 읊조린다. 어쩜 그리도 내 마음을 잘 들여다보았는지 신기했던 기억이 여전히 새롭다. 나이 들어가며 ‘사과 두 개’가 어린이에게만 해당하는 게 아니란 걸 점점 더 실감한다. 돌아보면 비교와 선택의 사과 두 개는 대학과 전공, 직장, 결혼 등등 인생 전체를 관통하고 있었다. 결혼상대로 두 사람이 나타났을 때는 소위 “쌍무지개가 떴다”고들 말한다. 비교하고 재보는 사이 무지개가 사라지듯 둘 다 무산되기에 십상이란 뜻일 게다.
냉철하게 따져봐야
한 사람을 놓고서도 따지기 시작하면 한이 없어 결정을 주저하게 된다. 결국, 마음을 정했다가도 뒤집을 때가 있다. 한 다리 건너 아는 어느 후배도 그런 경우였다. 그녀가 남자에게 이별을 통보한 날, 그는 헤어지는 그녀의 뒷모습에서 한쪽은 올라가고 다른 한쪽은 내려간 코트 깃을 보았다. 그리고 다가가서 깃을 다독여줬다. 그 작은 행동 하나로 그녀는 마음을 돌이켜 둘은 결혼했단다. 그러나 결혼생활은 힘들었고, 그녀는 “그놈의 코트 깃 때문에.”를 입에 달고 산다고 한다.
그런 얘기를 들을 때면 ‘순간의 선택이 10년을 좌우한다’는 문구가 떠오른다. 컬러TV가 막 나오면서 대히트를 치더니만 이제는 인생의 격언처럼 입에 오르내리는 광고카피다. 우리 집 냉장고는 10년이 아닌 30년을 좌우한다로 고쳐야 할 만큼 긴 세월 동안 쌩쌩해서 잘한 선택이라 싶다. 결혼에서 두고두고 잘한 선택으로 여겨지려면 10년에다 0을 하나 더 붙여야 하지 않을까. 아무리 요즘 무색해져 간다고는 해도 ‘백년해로’를 바라보는 게 결혼이니 말이다. 게다가 한 결혼이 세대를 이어가며 미치는 영향을 생각하면 숫자는 더 커질 수밖에 없다.
이보다 더하면 더하지 덜하지 않은 것이 대통령을 선택하는 일이라는 생각이 든다. 코앞에 다가온 이번 19대 대선에서 순간의 선택이 결코 임기 5년만을 좌우하지는 않는다. 안팎으로 나라가 위기상황에 처해있는 마당이라 더욱 그렇다. 어떤 후보를 선택해야 하나? 대통령 선택은 절대 감정에 휘둘릴 게 아니다. ‘카더라 방송’에 팔랑 귀가 되지 않고, 내가 믿고 싶은 것만 믿으려는 오류에도 빠지지 않도록 정말 냉철하게 따져봐야겠다. 이번에야말로 진정 자랑스러운 대통령을 갖고 싶은, 나는 이 나라의 주인인 국민이기 때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