삼성전자의 선택… 지주사 전환 대신 자사주 소각

삼성전자가 지주회사로 전환하지 않기로 최종 결정했다. 작년 10월 미국계 헤지펀드 엘리엇 매니지먼트가 공개서한을 보내면서 촉발된 지주회사 전환 논란에 대해 종지부를 찍은 것이다.

삼성전자는 27일 이사회를 열고 "지주회사로 전환할 경우 사업 역량을 분산시켜 오히려 회사의 경쟁력 강화에 도움이 되지 않는다"며 이같이 결정했다. 이와 함께 삼성전자 지분의 13.3%(약 45조원·보통주 1798만주, 우선주 323만주)인 자사주 보유분을 내년까지 전량 소각하기로 했다. 지주회사 전환에 필요한 자사주를 소각함으로써 향후 이번 결정이 번복될 가능성을 아예 차단해버린 것이다. 삼성전자 고위 관계자는 "이재용 부회장의 지배권 강화를 위해 지주회사로 전환한다는 부정적인 시각을 불식시키고 오로지 경영실적으로만 주주들에게 평가받겠다는 의지를 밝힌 것"이라고 말했다.

◇"지주회사 전환, 현실적으로 어렵다"

삼성전자가 지주회사 전환을 중단하기로 결정한 것은 현행법의 테두리 안에서는 현실적으로 많은 난관이 있기 때문이다. 우선 삼성전자를 삼성전자 지주회사와 사업자회사로 분할할 경우, 기존 삼성전자 지분을 보유하고 있는 삼성생명(지분율 7.55%)·삼성화재(1.32%) 등 금융 계열사들은 기존 지분 대신 받게 되는 삼성전자 지주회사나 자회사 신주(新株)를 최악의 경우 전량 매각해야 하는 상황에 빠질 수 있다. 금융자본과 산업자본을 분리하는 금산 분리 원칙에 따라 금융 계열사들이 삼성전자 신주를 5% 이상 새로 취득할 경우엔 금융 당국의 승인을 받아야 하고, 승인을 받지 못하면 매각해야 하기 때문이다.

삼성전자 관계자는 "삼성생명이 신주를 매각해야 하는 경우에는 삼성전자에 대한 지배구조가 오히려 더 취약해질 수 있고 이를 방어하기 위해 수십조원의 비용을 들여야 한다"고 말했다. 예컨대 지주회사 격인 삼성물산이 삼성생명으로부터 삼성전자 지분을 전량 인수할 경우 무려 20조원이 넘는 자금이 소요된다.

여기에 정치권에서 사실상 삼성그룹을 겨냥해 지주회사 전환을 통한 지배권 강화를 제한하는 법안 제정을 잇달아 추진하는 것도 상당한 부담이다. 현재 정치권에서는 지주회사 전환 때 신설 지주회사에 사업자회사의 신주 배정을 금지하거나 자사주의 의결권을 제한하는 법안 등을 추진하고 있다. 이럴 경우 신설되는 삼성전자 지주회사는 사업자회사의 지분을 아예 가질 수 없거나 기존에 갖고 있는 자사주(13%)를 신주로 교환하더라도 의결권이 소멸된다. 이병태 KAIST 교수(경영학)는 "현재 여건 속에서는 삼성전자를 지주회사 체제로 전환할 수 있는 방법이 없다"며 "최대한 현상을 유지하는 상태에서 자사주 매입과 소각 등을 통해 경영권을 방어하는 고육책을 선택한 것으로 본다"고 말했다.

지주회사 전환 과정에서 부품사업(반도체·디스플레이)과 완제품(스마트폰·TV·가전)이 절묘한 시너지(상승효과)를 내고 있는 사업 구조가 흔들릴 수 있는 우려도 나왔다. 서울대 송재용 교수(경영학)는 "지주회사로 간다고 해서 반드시 기업 경쟁력이 강화된다고 볼 수도 없다"고 말했다.

◇상법 개정안 맞물려 경영권 약화 우려

삼성전자가 지주회사 전환을 포기하면서 삼성전자의 경영권이 투기자본의 공격에 취약해질 것이라는 우려도 나온다. 현재 삼성전자는 이건희 회장과 이재용 부회장 등 오너 일가와 계열사들이 보유하고 있는 지분은 18.45%다. 현재 삼성전자의 시가총액이 300조원이 넘는 것을 감안하면 해외 헤지펀드가 삼성전자를 직접 공격해 경영권에 개입하기는 현실적으로 어렵다. 하지만 해외 투기자본이 지주회사 격인 삼성물산(시가총액 약 23조원)을 공격해 삼성물산이 거느리는 삼성전자 경영에 개입할 수는 있다. 최악의 경우 삼성물산이 보유하고 있는 삼성전자 지분(4.25%)을 매각해 배당을 하라고 요구할 수도 있다.

게다가 현재 정치권에서는 감사위원 분리선출제와 집중투표제, 금융회사의 비(非)금융계열사 의결권 제한 등 삼성전자의 지배권을 뒤흔들 만한 법안이 잇따라 추진되고 있다. '감사위원 분리선출제'는 감사위원 선임에 대한 대주주의 의결권을 3%로 제한하는 것이며, 집중투표제는 이사 선임 때 주주들에게 새로 선임되는 전체 이사 수만큼 투표권을 주고 이를 한 명의 후보에게 몰아서 투표할 수 있도록 하는 것이다. 이럴 경우 지분이 작은 해외 투기자본도 삼성 계열사 이사회에 자신이 원하는 사람을 선임할 수 있게 된다.

삼성전자가 약 45조원 가치의 자사주 소각 방침을 밝힌 것도 현 상황에서 경영권을 방어하기 위한 고육지책이다. 향후에도 자사주 매입과 소각을 통해 주주 가치를 제고하는 한편, 전체 유통 주식 숫자를 지속적으로 줄여 기존 대주주의 지분율을 확대하겠다는 뜻이다. 삼성전자 관계자는 "애플이나 GE 등 오너 없는 글로벌 기업처럼 인위적인 지배권 강화가 아닌 경영 실적으로 주주들의 평가를 받겠다는 뜻"이라고 말했다.

한편 이날 삼성전자 주가는 전날 대비 2.4% 오른 219만2000원으로 장을 마감했다. 반면 삼성전자 지주회사 전환의 수혜를 볼 것으로 예상됐던 주요 삼성 계열사 주가는 큰 폭으로 하락했다. 삼성물산은 전날보다 6.8% 하락한 12만2500원, 삼성SDS는 6.5% 하락한 13만7000원을 기록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