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건 인사이드] 더하거나 주저하거나… 위조범은 흔적 남긴다

지난 2월 말 대검 과학수사부 문서감정실로 광주지검이 '문서 감정(鑑定)을 해 달라'며 수첩을 한 권 보냈다. 경찰서장 서모(48)씨에게 뇌물을 준 혐의로 수사를 받던 의약품 납품 업체 대표 정모씨의 수첩이었다. 광주지검은 경찰의 의약품 불법 리베이트 수사에서 처벌을 받지 않기 위해 정씨가 서씨에게 뇌물을 줬다는 정보를 입수한 상태였지만, '물증'을 확보하지 못한 상태였다.

문서감정실 수사관들이 며칠간 정씨의 수첩 내용을 분석했다. 날짜별로 기록된 수첩에는 '2016년 10월 14일 서○○ 점심식사'라는 메모가 있었다. 분석에 들어간 지 사흘 만에 실마리가 풀렸다.

문제의 메모 중 '점심식사'의 'ㅈ'이 수첩의 다른 곳에 기재된 정씨의 평소 필적(筆跡)과 모양이 달랐던 것이다. 수사관들은 즉각 디지털현미경을 사용해 정밀 분석에 들어갔다. 그 결과 원래는 숫자 '7'을 적었다가 획을 하나 더해 'ㅈ'으로 고친 사실이 드러났다. 정씨가 원래는 '서○○ 7'이라고 메모했다가 '서○○ 점심식사'로 둔갑시킨 것이다.

대검으로부터 이 같은 문서 감정 결과를 넘겨받은 광주지검은 정씨로부터 "서씨에게 경찰의 수사 정보를 듣는 대가로 뇌물 700만원을 줬고, 이를 감추기 위해 수첩의 메모를 조작한 것"이라는 진술을 확보했다. 서씨는 지난 27일 1심에서 뇌물수수죄가 유죄로 인정돼 징역 1년을 선고받았다.

기술 발달과 함께 범죄자들의 문서 위조(僞造) 수법도 갈수록 교묘해지고 있다. 정씨처럼 손으로 쓴 수기(手記) 위조는 옛말이고 지문(指紋) 위조, 인영(印影·도장 자국) 위조 등 컴퓨터를 활용한 문서 위·변조 사례가 전체의 20%에 달할 정도다. 그에 따라 수사기관도 각종 첨단 기기를 활용해 위조를 잡아낸다.

대검 문서감정실은 2009년 최대 10만배까지 확대 관찰이 가능한 주사전자(走査電子)현미경을 들였다. 이 장비 도입 전까지는 500배 확대가 가능한 광학현미경을 썼다. 주사전자현미경은 인쇄된 종이의 재질이 어떤 성분으로 돼 있는지까지 가려낼 수 있다고 한다. 또 다양한 빛의 파장을 이용해 잉크 성분을 분석해내 위조지폐를 감별하는 데 쓰는 분광(分光)비교측정기, 펜에 눌린 자국이나 썼다가 지운 흔적 등을 복원해내는 필흔(筆痕)재생기 등 50여 개 장비를 갖춰 놓고 있다.

작년 12월 있었던 어음 사기 사건에선 분광비교측정기가 한몫했다. 당초 문제가 된 어음은 발행 일자가 '11월 29일'로 적혀 있었는데, 이 장비로 파장이 다른 빛을 여러 각도에서 비추자 '11'의 '1'자 한 개가 혼자서 다른 반사 빛을 냈다. 원래는 1월 29일이던 것을 11월 29일로 위조했던 것이다.

작년 4월 발생한 특허 계약서 위조 사건에선 범인들이 특허 계약서에서 사용 기간이 명시된 둘째 쪽만 위조해 특허 유효기간을 마음대로 늘렸다. 총 세 쪽인 계약서는 눈으로 보기엔 똑같았지만 현미경으로 보니 둘째 쪽에 인쇄된 글자들의 잉크 토너 분사 형태가 다른 쪽들에 담긴 글자들과 다른 것으로 드러났다.

윤영미(48) 대검 감정관은 "위조범들이 자기도 모르는 사이에 남기는 실수나 주저흔(躊躇痕) 등 숨은 비밀을 놓치지 않아야 증거를 확보할 수 있다"며 "위조범들의 기술이 발달하면서 감정관 구성도 어학 전공자에서 컴퓨터공학, 전자공학, 화학 전공자로 다양해지고 있다"고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