市內가 연기 뒤덮였는데 대피 문자 없어… 강릉, 공포의 19시간

"하룻밤 새 모든 게 사라지다니 꿈만 같습니다. 당장 오늘 밤은 어디서 보내야 할지…."

7일 오전 강원 강릉시 성산면 관음리. 화마(火魔)가 덮친 마을은 포탄이 떨어진 전쟁터 같았다. 전날 오후 인근 어흘리 야산에서 시작된 산불은 삽시간에 관음리로 번졌다. 마을 도로 양옆 쪽 산허리는 시커멓게 그을렸고, 민가(民家)는 지붕이 폭삭 내려앉아 쓰레기더미로 변했다. 불길이 뿜어낸 열기에 출입문은 엿가락처럼 휘었고, 숯이 된 서까래 위로 깨진 기왓장들이 뒹굴고 있었다. 김승기(62)씨는 넋 나간 사람처럼 폐허가 된 집 앞에 주저앉아 중얼거렸다. "여생을 보내려 그간 모은 돈을 전부 부어 산 집인데, 하루아침에…." 연휴 기간 전남 완도로 가족 여행을 갔다 온 덕택에 그나마 몸 상하는 일은 면했다.

54년째 산 집이 사라진 최종필(73)씨는 차마 발걸음을 떼지 못했다. 십수년 전부터 뇌졸중으로 거동이 불편한 아내와 살고 있는 최씨는 6일 산불 감시원 도움으로 간신이 몸만 뺐다. 불길이 잡힌 7일 돌아와 숯더미가 된 집을 보았다. 그는 "선조들 영정도 챙겨 나오지 못했는데 후손 도리를 다하지 못한 것 같아 죄송스럽다"며 왈칵 눈물을 쏟았다. 3300㎡(약 1000평) 규모의 표고버섯 농장을 운영하는 조영남(59)씨는 고무 호스로 물을 뿌리며 불길에 맞섰지만 힘에 부쳤다. 비닐하우스 2개 동과 농기계 창고가 재로 변했다.

연휴 막바지인 6일 오전부터 7일까지 강원 강릉과 삼척, 경북 상주 일대를 태운 산불로 1명이 사망하고 2명이 다쳤다. 불은 임야 49만여평(163㏊)을 태웠고, 민가 30여채가 소실됐다. 이재민 550여명이 생겼고 주민 수천명이 긴급 대피했다.

동해안 일대에서 대형 산불이 나기는 2005년 낙산사 소실 피해가 발생한 양양 산불 이후 12년 만이다. 강릉과 상주의 산불은 7일 오전 큰 불길이 잡혔지만, 삼척 산불은 오후 5시 현재 불길의 30% 정도만 잡힌 상황이라고 산림청은 밝혔다. 산림청은 이 세 곳 말고도 동해안의 경북 영덕 등 전국적으로 10여곳에서 산불이 났다고 밝혔다. 7일 오후 7시 30분쯤엔 사드(THAAD·고고도 미사일 방어 체계)가 배치된 경북 성주골프장에서 340m 떨어진 달마산 정상 부근에서도 크지 않은 산불이 났다.

당국은 세 곳 산불 모두 입산객이나 주민의 부주의에 의한 실화(失火)가 원인이라고 추정하고 있다. 6일 오후 3시 32분쯤 성산면 어흘리 인근 야산에서 난 강릉 산불은 초속 15~20m의 강풍을 타고 급속히 번졌다. 관음리와 위촌리 등 6개 마을 주민들은 인근 노인회관 등지에서 뜬눈으로 밤을 보냈다. 산림을 태운 연기가 바람에 실려 3시간여 만에 직선거리로 7㎞ 떨어진 강릉 도심으로 밀려들었다. 불길이 강릉교도소 담장에도 붙어 한때 재소자 이감(移監)까지 검토됐다. 주민들은 밤새 공포에 떨었다. 이상우(67)씨는 "불붙은 낙엽 뭉치가 바람을 타고 총알처럼 날아다녔다"며 "시내가 연기로 뒤덮이고, 밤새 사이렌이 울린 탓에 재난 영화를 보는 것 같았다"고 했다. 소방 당국은 불이 난 지 19시간 만인 7일 오전 10시 36분쯤 큰불을 잡았다.

6일 오후 2시 10분쯤 경북 상주시 사벌면 덕가리 인근 야산에서 시작된 상주 산불로 등산객 김모(58·여)씨가 불길을 피하다 실족해 숨지고, 일행인 장모(64)씨와 김모(57)씨가 얼굴·목 등에 화상을 입었다. 불길이 확산하면서 사벌면 매호리와 퇴강리, 함창읍 등 123가구 215명이 인근 5곳의 마을 회관으로 분산 대피해 뜬눈으로 밤을 지새웠다. 불은 20시간 만인 7일 오전 10시가 넘어 꺼졌다.

가장 이른 시각인 6일 오전 11시 42분쯤 삼척 도계읍 점리의 야산에서 시작된 삼척 산불은 7일 오후까지 산림 100㏊와 폐가 2채를 태웠지만 여전히 불길이 살아 있다. 당국은 인근 지형이 험하고 진화 작업을 하는 헬기가 물을 긷는 집수원(集水源)이 멀어 쉽지 않은 상황이라고 밝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