웃다가 찡 울다가 킥, 바람 잘 날 없는 가족

세 살 버릇 여름까지 간다

이기호 소설집｜마음산책｜248쪽｜1만2500원

웃고 싶었다. 소설가 이기호(45)의 새 가족소설 '세 살 버릇 여름까지 간다'를 펼친다. 에피소드 제목은 '장모님의 미역국'. 출산한 아내 도와주러 집에 오신 장모님이 음식을 만들었다. 인생 대부분을 생계 위한 꽃집 운영에 매달렸던 장모님은 음, 역시 꽃집 전문가였던 것이다. '조금 버릇없고 염치없다'는 전제를 달긴 하지만, 작가는 이렇게 썼다. '뭐랄까, 재료와 재료들이 각기 배낭을 메고 어디론가 긴 여행을 떠나는 것 같은 느낌이 들었다. 한술 뜨면 오징어와 암소와 참치가 씨익 웃고 난 뒤 등 돌려 저 멀리 석양을 향해 걸어가는 듯한 느낌.'

울고 싶어질 때도 있다. 통곡까지는 아니고, 키득거리다 찡해지고 싶을 때. 다시 이 바람 잘 날 없는 식구들 이야기를 펼친다. 이번 에피소드의 제목은 '그래서 우리는 조금 더 가까이 있었다'. 우다다다 정신없는 아이 셋을 둔 젊은 소설가 부부의 24평 아파트는 광주 외곽에 있다. 책장 하나, 피아노 하나를 들이고 나니 장롱도 식탁도 없는 단출한 살림. "장롱 하나 갖고 싶다"고 독백하던 아내의 말을 허투루 듣지 않은 남편, 아파트 모델하우스에 금방이라도 계약할 기세로 들어선다. 기존 아파트 대출금도 아직 3년이나 남았는데. 철없다 핀잔하는 아내에게 '집 옮기자 하지 않았느냐. 장롱 갖고 싶다 하지 않았느냐' 대꾸하자, 돌아온 대답. "그건 그냥 장롱 얘기지…. 내가 혼수로 그걸 못했으니까."

조금 길어지지만 에피소드를 마무리해 보자. 남편은 죄지은 아이처럼 아내 뒤를 쫓아갔다고 한다. 그날 밤 써야 할 원고를 마치고 안방에 들어가자, 아내와 세 아이가 침대 바로 밑 좁은 방바닥에 이불을 깔고 나란히 누워 있더라나. 침대에서 자면 아이들이 따라 올라올까 봐, 그러다가 행여 아래로 떨어지기라도 할까 봐 아내는 항상 방바닥에서 잠을 잤다고 했다. 옹기종기, 다닥다닥. 그래서 작가 남편도 침대에 오르지 못하고 그들 틈에 살짝 모로 누웠다고 했다. "쌕쌕거리는 아이들의 숨소리가 들리고 아내의 콧김이 내 뺨에 와 닿았다. 아이들의 살내음과 아내의 살내음도 와 닿았다. 누운 자리는 좁았고, 그래서 우리는 조금 더 가까이 있었다."

'세 살 버릇 여름까지 간다'는 44편의 짧은 에피소드로 이뤄진 가족소설이다. '여든'을 잘못 쓴 게 아니다. '여름'이다. 초등학교 입학통지서 받은 '큰놈'이 밤에 묻더란다. 낮에 책에서 읽었는데, 세 살 버릇 언제까지 가는 줄 아빠는 아느냐고. 영어 학원은커녕 태권도 학원 석 달 시킨 게 과외의 전부였던 아빠가 뿌듯해하며 되묻자 돌아온 대답, '여름'. 아빠는 아랫입술을 깨문 채 눈을 질끈 감았다고 했다. '그래 여름까지 가자, 여름까지만 가면…' 속으로 되뇌면서.

44편의 이 가족 이야기는 이렇듯 한결같다. 웃다가 찡. 울다가 킥.

1999년 월간 '현대문학'으로 등단한 이기호의 20년 남짓 작가 생활도 이런 명사와 형용사로 요약된다. 익살과 넉살, 재기와 발랄, 그리고 여운과 페이소스. 예전의 문학평론가라면 '탈권위' '언어적 난장' '비주류의 어법' 등으로 수식했을까. 하지만 그 특유의 입담과 활기를 표현하기에는 조금 어색하다. 저잣거리 마당극을 바흐와 하이든의 문법으로 해석하려는 시도랄까.

'김박사는 누구인가?' '갈팡질팡하다가 내 이럴 줄 알았지' '최선덕 성령충만기' '차남들의 세계사' 등을 따라 읽어온 독자라면 이 짧은 소설집이 소품으로 느껴질지 모른다. 하지만 장편과 단편의 전통적 구분이나 소설 자체의 문법이 변화하고 있는 요즘 이기호의 새 작품은 소설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분량이 아니라는 사실을 천진난만하게 보여주고 있다. 전작 '웬만해선 아무렇지 않다'와 이번 '세 살 버릇 여름까지 간다'가 그 모범 사례다.

한 가지 더. 우리는 지금까지 '가족소설'이라는 장르에서는 최인호(1945~2013)의 '가족'을 떠올려왔다. 월간 '샘터'의 1975년 9월호에서 시작해 400회를 연재하며 다혜와 도단이를 마치 우리 아들·딸 혹은 조카로 착각하게 만들었던 작품. 이제 한 세대 넘는 격차를 두고 '세 살 버릇…'이 도착했다. 문학은 올림픽이 아니므로 최인호와 이기호를 비교할 수는 없을 것이다. 하지만 이기호가 지지 않을, 아니 훌쩍 능가하는 대목이 있다. 아들 둘, 딸 하나. 그는 무려 아이 셋의 아버지다.

소설가의 '19금 익살'을 허용하자면 사석에서 작가는 스스로를 '정○왕'이라며 자부한 적이 있다. 경험한 독자들은 알겠지만, 양육의 세계에서 아이 둘과 셋은 단지 숫자 하나 차이가 아니다.

그러니, 독자들이여. 웃고 싶은가. 이기호를 읽어라. 웃다가 찡해지고 싶은가. 역시 이기호를 읽어라. '가족의 달' 첫 주말이, 지금 막 시작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