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F·액션·멜로… 풍성해진 한국 영화, 칸 달궜다

22일 오전 11시(현지 시각), 홍상수(57) 감독의 프랑스 칸 영화제 경쟁 부문 진출작 '그 후'를 처음으로 공개하는 언론 시사회가 열린 페스티벌 궁 3층 바쟁 극장 앞. 뒤늦게 도착한 기자 여럿이 씩씩대며 발걸음을 돌렸다. 280석 좌석 전체가 시작도 전에 꽉 찼기 때문. 페스티벌 궁 안 여러 극장 중에서 작은 편이긴 하지만, 좌석이 모자랄 만큼 성황을 이루는 건 흔치 않은 일이다. 그만큼 홍 감독의 '그 후'에 대한 세계 언론과 평론가들의 관심은 컸다. 프랑스 영화 전문지 포지티프 등에 기고하는 영화평론가 니오그레 위베르씨는 시사회가 끝난 뒤 "환상적(fantastic)이다. 지금까지 본 경쟁 부문 작품 중 최고"라고 말했다.

◇홍상수 감독 '그 후', 의외의 호평

'그 후'는 '당신 자신과 당신의 것' '밤의 해변에서 혼자' 등 홍 감독 최근작들처럼 배우 김민희가 출연하며 불륜 이야기다. 함께 일했던 여직원(김새벽)과 연애하다 헤어진 뒤 괴로워하는 유부남 출판사 사장이자 잘나가는 문학평론가 '봉완'(권해효). 늘 야근하는 봉완이 일하러 간 사이, 아내는 시를 쓰듯 사랑 고백을 해놓은 남편의 연애편지를 들고 출판사로 찾아간다. 봉완과 연애하던 여직원은 이미 회사를 그만뒀다. 첫 출근 한 작가 지망생 여직원 '아름'(김민희)이 그녀를 불륜 상대로 오해한 아내에게 대신 봉변을 당한다. 우유부단한 거짓말쟁이 봉완은 전 애인이 돌아오겠다고 하자 아름에게 회사를 그만두라고 종용한다…. 이 막장 드라마의 끝은 어디일까.

21일 '클레어의 카메라' 상영 뒤 프랑스 국민 여배우 이자벨 위페르를 출연시키고도 혹평받았던 홍상수 감독은 이날 '그 후'로 의외의 반전을 이룬 분위기다. 캐릭터와 대사, 이야기는 훨씬 섬세하고, 실체와 믿음을 논하는 홍 감독 특유의 철학적 대사도 살아 있다는 평이다. 유독 해외 평단과 영화제의 호평을 받는 감독인 만큼, 올해 칸에서도 집중 조명을 받게 될 공산이 높다.

◇칸의 밤 달군 본격 액션 '악녀'

올해 칸에서는 어느 때보다 우리 영화가 높은 주목과 기대를 받고 있다. 앞서 이날 새벽 0시 30분엔 미드나이트 스크리닝 부문에 초청된 우리 영화 '악녀'(감독 정병길)가 뤼미에르 극장에서 첫선을 보였다. 도입부터 수백 명 건장한 남자들을 한 명 한 명 쓰러뜨리며 시체의 산을 오르듯 힘겹게 앞으로 나아가는 한 여자의 뒷모습이 객석을 홀렸다. 주인공 일인칭 시점의 컴퓨터 게임처럼 스크린 속으로 빨려 들어가는 느낌이다. 5분여 지속된 액션 장면이 끝났을 땐, 함성과 박수가 극장을 가득 메웠다. '악녀'가 초청된 미드나이트 스크리닝 부문은 밤에 어울리는 공포·액션·스릴러 등 장르 영화가 주로 상영된다. 이 부문에는 우리 영화 '불한당'(감독 변성현)도 24일 공식 상영을 앞두고 있다.

올해 칸에는 우리 영화 5편이 공식 초청을 받았다. SF, 액션, 멜로 등 장르와 색깔도 다양해서 올해 칸을 풍성하게 하는 주인공 대접을 받고 있다. 한·미 공동 제작인 '옥자'(감독 봉준호)는 코미디·액션·SF 등이 뒤섞인 혼성 장르 영화로, 영화제 초반부터 뜨거운 관심을 받았다. 올해로 20번째 칸 영화제에 참석한 전찬일 영화평론가는 "외국 영화제에서 중국 영화는 그냥 '중국 영화', 일본 영화는 그냥 '일본 영화'처럼 보이지만, 한국은 작품마다 성격이 모두 다르다. 우리만큼 영화마다 다양한 색깔을 드러내는 나라는 드물다"고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