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법 천막'은 광장에만 있는 게 아니다

31일 서울 경복궁 맞은편 대한민국역사박물관 인근. 폭 6~7m 정도 인도(人道)의 절반을 천막 12개가 점령하고 있었다. 그 주변엔 '교육 적폐 청산' '노동 3권 쟁취'라고 적은 입간판 3개와 현수막 4개가 있었다. 민주노총이 지난 29일부터 문재인 정부를 상대로 "촛불 혁명으로 들어선 새 정부가 비정규직 철폐 등 적극적인 개혁 정책을 펼쳐야 한다"며 인도에 불법으로 세운 것들이다. 천막이 차지한 공간은 최소 180㎡ 이상. 그 주변엔 빈 맥주병, 물병 등 쓰레기가 나뒹굴고 있었다.

이날 낮 12시쯤 외국인 관광객 수십 명은 천막과 입간판, 쓰레기 사이로 조심조심 걸음을 옮겼다. 점심을 위해 직장인들까지 합세하자 인도는 금세 북새통이 됐다. 수학여행을 온 와부초교 학생 김모(9)군은 "역사박물관에서 경복궁으로 가는 길에 천막들이 세워져 있으니, 담임선생님이 아무거나 함부로 만지지 말고 앞만 잘 보고 가라고 주의를 줬다"고 했다. 직장인 김준민(32)씨는 "뉴스를 보니 시청광장엔 불법 천막들이 정리됐다고 들었는데, 집회 자유를 보장하는 것도 물론 중요하지만 천막으로 뒤덮인 인도를 지나갈 때마다 불편하다"고 했다.

시민들이 마음 놓고 다녀야 할 인도와 광장이 농성 천막과 불법 점거 시설로 몸살을 앓고 있다. 서울 종로구에만 인도를 점령한 불법 천막이 6곳이다. 대한민국역사박물관 길 건너편 정부 서울청사 정문은 지난 2월부터 불법 천막 2개에 점령당하다시피 했다. '남북 경협 기업의 생존권 보장을 위한 비상대책본부'가 통일부를 상대로 "2008년 금강산 관광 중단과 2010년 5·24 대북 제재로 입은 피해를 보상해달라"며 천막을 세웠다. 31일 현재 105일째 농성 중이다.

최근엔 전공노(전국공무원노동조합)도 같은 장소에서 문재인 대통령을 상대로 '성과 퇴출제 폐지' 등을 요구하며 17일째 농성을 하고 있다. 그곳에서 약 200m 떨어진 광화문역 2번 출구 앞에선 '사드 철회'를 주장하는 한 단체가 비닐형 천막을 세우고 현수막을 건 채 무단 점거 중이다.

국회의사당이 있는 서울 여의도 일대도 마찬가지다. 영등포경찰서에 따르면 인도에 방치된 불법 점거 시설은 4곳. '태블릿PC 조작 진상규명위원회'란 단체는 '박근혜 전 대통령 파면 반대' '5·18 가산점 폐지' 등을 주장하며 지난 2월 24일 국회의사당 3번 출구 앞에 비닐 천막을 세웠다. 인도 곳곳엔 현수막 10여개를 불법 설치했다. 직장인 안모(35)씨는 "현수막으로 출퇴근 시간 유동 인구도 많은 지하철 입구 근처를 이렇게 지저분하게 만들어도 되는지 의문"이라고 했다.

불법 시설물 철거 책임이 있는 구청과 경찰은 손을 놓은 채 책임을 떠넘기고 있다. 인도를 점령한 천막은 현행법상 당장 철거해야 할 불법 시설물이다. 하지만 경찰은 "통행 문제를 이유로 집회 신고, 시설물 설치를 막을 권한은 경찰에 있지만, 이미 설치된 천막 등 도로 시설물 단속은 구청의 소관"이라는 입장이다. 경찰 관계자는 "집회·시위 신고가 되어 있더라도 구청이 보행에 방해되는지 등을 살펴 철거 여부를 판단해야 한다"고 했다. 반면 관할 기관인 각 구청은 불법 천막이 도로법을 위반했어도 '집회 및 시위에 관한 법률'에 따라 신고가 된 경우 강제 집행이 쉽지 않다는 입장이다. 구청 관계자는 "집회·시위 자유를 보장해야 한다는 목소리가 높아 경찰에 신고된 집회를 철거하기 어렵다"며 "딱한 사정 때문에 거리로 나온 시민일 경우에는 더더욱 부담스럽다"고 했다.

최근 문재인 정부 출범 이후 청와대와 더불어민주당 등 여권(與圈)에 각종 단체의 입법 요구와 민원이 쏟아지면서 앞으로 불법 점거 농성이 이어질 가능성이 크다는 관측이 나온다. 종로경찰서 관계자는 "청와대 인근 청운동만 따지면 몇 달 전만 해도 1주일에 한 번 정도 집회가 있었는데 최근엔 10번도 넘을 정도"라며 "집회가 격해져 무단 점거 농성으로 이어지진 않을지 우려스럽다"고 했다. 곽대경 동국대 경찰행정학과 교수는 "시민들은 정해진 법의 테두리 내에서 시위해서 시민 불편을 최소화하려는 성숙한 자세를 가져야 하고, 동시에 지자체는 집회·시위에 대한 구체적이고 일관된 처리 방침을 확립하는 것이 필요하다"고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