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 리뷰] 남자들 다 비켜! 세상은 내가 구한다

아이언맨과 스파이더맨 등을 거느린 '마블 엔터테인먼트'와 슈퍼맨, 배트맨 등이 포진한 'DC 엔터테인먼트'는 미국 만화·영화계의 양대 산맥이다. 하지만 최근 수년간 '어벤져스'와 '캡틴 아메리카' 등 마블의 영화들이 승승장구한 반면, DC의 영웅들은 평단 반응과 흥행 성적에서 침체를 벗어나지 못했다. 심지어 배트맨과 슈퍼맨 같은 간판스타들을 모두 투입했던 '배트맨 대 슈퍼맨: 저스티스의 시작'마저 초라한 성적에 그쳤다.

이 남자 영웅들을 대신해서 전면에 나선 여성 영웅이 '원더 우먼'이다. 31일 개봉한 '원더 우먼'(감독 패티 젱킨스)은 라이벌 마블사(社)에 연전연패하면서 체면을 구겼던 DC 엔터테인먼트를 구원하기 위해 새롭게 등장한 여성 영웅 영화다. 원더 우먼은 1941년 만화책으로 처음 나왔고 1975년에는 린다 카터 주연의 TV 시리즈로 제작됐다. 원더 우먼이 다른 영화에 조연으로 등장한 적은 있지만, 장편 영화에서 단독 주인공을 맡은 것도 76년 만에 처음이다.

아마존 여전사들의 왕국에서 공주로 태어난 '다이애나'(갤 가돗)가 섬에 불시착한 미 공군 조종사 '트레버 대위'(크리스 파인)를 만난 뒤, 전쟁의 위협으로부터 세상을 구하기 위해 1차 세계 대전으로 뛰어든다는 설정은 원작 만화와 크게 다르지 않다. 남성과 여성, 신화와 현실의 관계가 영화 속에서는 역전된다는 점이야말로 '원더 우먼'의 짜릿한 매력이다.

전쟁을 상징하는 남성 신(神) 아레스가 질투와 의심으로 가득 찬 반면, 여전사 아마존은 사랑과 평화를 상징하는 종족으로 묘사된다. 1차 대전의 참호전에 뛰어든 원더 우먼이 방패만으로 병사들의 기관총 세례를 막아내는 '시대착오적' 활약상도 이 영화에서만 볼 수 있는 매력이다. 연출을 맡은 여성 감독 패티 젱킨스는 사랑과 평화를 갈구하면서 세상을 구원하기 위해 나선 여전사 원더 우먼을 통해 따스한 여성주의적 메시지를 전한다.

겉모습만 보면 원더 우먼은 붉은 상의와 파란 팬티, 무릎까지 올라오는 빨간 부츠 등 성(性) 상품화를 부추기는 존재처럼 보였다. 하지만 질 르포어 하버드대 역사학 교수는 최근 국내 출간된 '원더우먼 허스토리'(윌북)에서 "페미니즘의 시작과 현재를 이어주는 잃어버린 고리가 원더 우먼"이라고 분석했다.

실제로 원더 우먼은 탄생 과정부터 여성 참정권 운동과 사회 참여 같은 주제와 밀접하다. 원작자인 심리학자 윌리엄 몰턴 마스턴(1893~1947)은 1941년 '원더 우먼'의 첫 원고를 보내면서 편집자에게 말했다. "지금 위대한 움직임이 일어나고 있습니다. 여성의 힘이 커지고 있어요." 그 힘을 상징하는 주인공이 원더 우먼이었다.

영화에는 약점도 적지 않다. 역사극과 전쟁물, 멜로물까지 너무 많은 장르가 겹쳐 있어 영화적 특징이 모호하다. 또 슈퍼맨과 배트맨이 인류를 구원하기 위해 싸우다가 좌절과 공허를 토로하면서 은퇴까지 결심하는 마당에, 뒤늦게 나와 사랑과 평화를 역설하는 원더 우먼은 왠지 순진무구하고 생뚱맞아 보인다. 한참이나 앞서간 남자 영웅들을 잰걸음으로 추격하는 것이야말로 속편의 향후 과제일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