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NOW] '녹음의 숲'에 갇힌 강의실

지난 23일 서울의 한 유명 사립대 경제학과 교수 A씨는 한 언론사에서 걸려온 전화를 받고 깜짝 놀랐다. 해당 기자는 독자 제보를 받았다며, 녹음 파일을 들려주었다. 거기엔 지난 4월 초 학과 강의 중 "청년수당은 실패한 정책 같다" "○○○이 대통령이 되면 좋지 않을까" 같은 말이 고스란히 녹음돼 있었다. A 교수는 "대선 관련 토론을 유도하기 위해 학생들과 다른 의견으로 말했던 것인데, 학생들이 고스란히 녹음해 제보한 것"이라며 "앞으로 무서워서 강의나 할 수 있겠냐"고 말했다.

최근 대학교수들의 강의 중 발언들을 학생들이 녹취해 인터넷 등에 공개하는 일이 늘면서, 교수들이 '녹음 노이로제(신경쇠약증)'를 호소하고 있다. 발언의 진의와 관계없이, 앞뒤를 자르고 공개하는 바람에 사회적 비난에 시달리기 때문이다.

서울 한 사립대 상경계열 최모(62) 교수는 최근 한 학생으로부터 학교 온라인 커뮤니티에 자신과 관련돼 나도는 소문을 듣고 깜짝 놀랐다. '최 교수가 수업 시간에 남자가 여자보다 높은 임금을 받는 것은 생산성이 높기 때문에 당연하다고 했으며, 관련 녹취록도 있다'는 것이었다. 최 교수는 "강의에서 '과거에는 남녀 간 교육 격차 때문에 임금 격차가 날 수밖에 없었다'는 걸 설명한 적이 있을 뿐이었는데, 앞뒤 맥락을 다 자르고 이상하게 편집된 것이었다"며 "강의하기가 두려울 정도"라고 말했다.

그동안 교수들은 학생들이 필기 대신 강의와 토론에 집중할 수 있도록, 강의 녹취를 허용하는 경우가 많았다. 그러자 학생들이 강의 중 교수 발언을 녹음해 외부에 공개하면서, 교수들이 사회적 비난에 시달리는 일이 발생하고 있다. 서울의 한 사립대 이모 교수는 "학점을 잘 못 받았거나 교수에게 혼난 걸 앙심 품고 메일로 내가 수업 시간에 했던 발언 중 일부를 악의적으로 뽑아 편집한 파일을 보내는 경우도 있다"며 "이것은 사실상 협박이나 다름없다"고 말했다.

학생들의 과도한 수업 녹취가 사실상 교수의 수업을 검열하는 것이라는 지적도 나온다. 숭실대 학생들은 올해 초부터 자체적으로 '교수의 학내 혐오 발언을 저장해 두겠다'며 소셜미디어 계정을 운영하기 시작했다. 한양대 총학생회도 지난 겨울 계절 학기부터 '강의실 내 숨은 혐오 찾기 제도'를 운영 중이다. 이런 활동이 교수의 부적절한 발언을 방지하는 순기능도 있으나, 교수의 강의 권한을 지나치게 제한한다는 지적도 나온다. 김정식 연세대 경제학부 교수는 "사회과학 등 학문은 특성상 다양한 견해에 대한 토론 유도가 필수인데, 강의 녹취로 문제가 되는 일이 많아 요새는 교과서 이론만 딱 설명하고 끝내는 교수도 많다"고 말했다.

교수들이 강의실에서 무분별한 발언을 하는 것이 문제라는 지적도 나온다. 최근 서울의 한 사립대에선 교수가 수업 중 특정 정치인을 비방한 후 "내 수업 내 맘대로 못 하냐"며 학생들의 반론을 단칼에 잘라버려 논란이 되기도 했다.

전문가들은 교수와 학생들 간의 이런 대립이 "교육적으로 전혀 바람직하지 않다"고 지적한다. 김석호 서울대 사회학과 교수는 "대학은 단순히 정답만 가르치는 곳이 아니다"면서 "교수와 학생의 건설적인 토론 기회 자체를 막으면 안 될 것"이라고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