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웅세계, '여걸'이 몰려온다

남자들은 세상 밖으로 나온 '원더우먼'(갤 가돗) 앞을 막아서며 "안 돼(No)"라는 말을 반복한다. "안 돼. 여자는 전쟁 상황실에 못 들어가" "안 돼, 그런 옷을 입고 다니면" "안 돼, 길에서 칼을 들고 다니는 건"…. 총탄이 빗발치는 1차 대전 벨기에 전선의 참호전 현장, 남자 군인들이 "우리도 지난 1년 동안 단 한 뼘 전진하지 못했는데 네가 뭘 할 수 있겠느냐"고 할 때, 원더우먼이 받아친다. "그걸 해낼 사람은 저예요." 그녀가 팔찌와 방패로 기관총 세례를 받아내며 한 발 한 발 전진하자, 남자들은 그제야 그 뒤를 따른다.

사회 전방위에서 여성들의 약진이 두드러지지만, 유독 영화는 그동안 '여성 수퍼 영웅'에 인색했다. 개봉하는 나라마다 흥행 1위를 달리고 있는 DC코믹스 원작의 영화 '원더우먼'(감독 패티 젱킨스)은 스크린 위에도 이제 '여성 수퍼 영웅의 시대'가 도래했다는 개전(開戰)의 나팔소리다. 세상을 구할 여성 영웅들이 줄을 서 있다.

◇세계대전·여권운동이 낳은 여성 영웅

1940년대 여성 영웅 원더우먼은 그 등장 자체로 시대를 앞서간 혁명이었다. 원더우먼의 종족 이름 '아마존'은 그리스 신화의 여성 전사 종족 '아마조네스'를 떠올리게 하지만, 갓 여성 대학 교육이 허용된 당시엔 집을 떠나 대학에 진학한 여성들을 일컫던 말이기도 했다. 세계대전에 참전한 남성들의 빈자리를 메우며 여성이 속속 사회에 진출하고, 급진적 참정권 운동과 피임·낙태권 운동이 활발하던 시대. 최근 발간된 '원더우먼 허스토리'(윌북)에서 저자 질 르포어 하버드대 교수는 "원더우먼 속 악당들의 공통점은 여성의 평등한 권리를 반대한다는 것"이라고 지적한다. "원더우먼이 창조된 것은 여성이 남성보다 열등하다는 통념에 대항하고, 아이들과 청소년에게 강하고 자유로운 여성의 기준을 제시하며, 소녀들에게 스포츠·전문직에서도 성공할 수 있다고 자신감을 불어넣기 위한 것이었다." 영화 '원더우먼'은 시대 배경을 1차 대전으로 옮겨, 짐짓 강한 척하는 마초 남성들의 지배가 끝에 다다랐고 이제 세계는 여성이 구원한다고 선언한다.

◇수퍼 영웅 영화도 여성 시대 눈앞

영웅들의 종합 선물 세트 격인 영화 '어벤져스'에서, 폭주하는 녹색 괴물 '헐크'(마크 러펄로)는 '블랙 위도'(스칼릿 조핸슨)가 손을 잡아 줄 때에야 비로소 얌전해진다. DC코믹스와 함께 수퍼 히어로 영화의 양대 기둥인 마블의 작품에서도 새로운 여성 영웅들이 관객과 만날 채비를 하고 있다. 2019년 봄 개봉 예정인 '캡틴 마블'은 영화 '룸'(2015)으로 오스카 여우주연상을 받은 브리 라슨(27)을 주인공으로 캐스팅했다. 공군 출신에 못 하는 것 없는 최고 인기 캐릭터다. 내년 개봉하는 '어벤져스: 인피니티 워'에도 출연한다. 마블 입장에서는 수퍼 영웅의 세대교체를 위한 선택이기도 하다. 매력적 반(反)영웅들로 가득한 DC코믹스 원작 영화 '수어사이드 스쿼드'로 깜짝 스타가 된 여성 악당 '할리 퀸'(마고 로비)도 단독 주연 영화로 제작 중이다. DC의 여성 악당 '포이즌 아이비'가 상대역이 될 예정인데, 연기파 배우 제시카 채스테인(40)이 한 인터뷰에서 "꼭 해보고 싶다"는 의사를 밝혔다.

영화 '원더우먼' 막바지, 상대역인 미군 첩보원 '스티브'(크리스 파인)는 독일군의 극비 무기를 없애러 떠나기 전 원더우먼에게 부탁한다. 자신은 현재를 구할 테니, 당신은 미래를 책임지라고. 어제의 세계를 맡았던 것이 남성이었다면, 이제 내일의 세계를 구원할 임무는 여성 수퍼 영웅들의 몫이다. 파우스트의 마지막 구절처럼, 마지막에 세상을 구원하는 건 역시 여성적인 것들인지도 모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