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 리뷰] 유난히 뜨거웠던 열여덟 그해 여름

치기 어린 젊은 시절, 누구나 기억에 남을 한철을 난다. 가족은 '웬수', 세상에는 나 '혼자', 온갖 고민은 다 짊어진 것 같던 그 시절. 8일 개봉한 영화 '용순'(감독 신준)에서, 충청북도 한 시골 마을 여고생 '용순'(이수경)의 열여덟 살 여름도 어느 해보다 무더웠다.

용 용(龍)에 순할 순(順), 낳을 때 엄마가 하도 용을 썼다고 작명 센스 빵점인 아빠가 지은 이름. 까칠한 여고생 용순은 육상 여고대항전 감독으로 온 체육 교사(박근록)를 사랑하게 된다. 그런데 늘 '체육'이라 불렀던 그에게 딴 여자가 생긴 것 같다. 단짝 친구들과 미행도 해보고 생떼도 부려보지만, 도통 알 수가 없다. 속 터질 일은 또 있다. 옛 애인과 도망가서 먼저 죽은 엄마는 아직도 용순의 마음에 큰 상처. 그런데 아빠가 "다 널 위해서"라며 몽골에서 덜컥 새엄마를 데려온다. 레슬링 선수였다는 이 새엄마 역시, 뭔가 수상하다.

철이 없는 건지 조숙한 건지 잘 분간이 안 되는 용순과 친구들은 그 나이에 떠올릴 수 있는 온갖 사건 사고를 다 저지른다. 좋아하는 선생님을 위해 뱀술을 담그고, 손발 오그라드는 설익은 연애편지를 써서 시(詩)라며 건네는 풍경에 객석에선 폭소가 터진다.

'용순'과 '체육'이 정말 진지한 사이인지 여부는 영화 끝까지 집중하게 만드는 수수께끼. 그 나이 땐 머릿속 상상이나 바람이 현실과 묘하게 뒤섞이는 법이지만, 이런 설정은 자칫 이야기를 구질구질하게 만들 위험도 있다. 하지만 재치 있는 음악과 편집, 개그감 넘치는 대사와 상황 설정 덕에 시종일관 산뜻함을 잃지 않는다.

누구나 어설프고 아팠던 추억 몇 장면을 가슴에 품고 산다. 책을 뒤지다 툭 하고 떨어진 옛 사진을 볼 때의 그리움. 이 영화가 딱 그렇다. 독한 감기 탓에 이불이 땀에 폭 젖었지만, 이제는 열도 내리고 몸도 가벼운 아침 같은. 잘 만든 독립영화에서만 느낄 수 있는 청량함이 가득하다.

한예종 출신의 패기 발랄한 프로듀서들이 만든 영화사 '아토' 작품. 사춘기 소녀들의 성장통을 투명한 접사(接寫)로 담아낸 영화 '우리들'(감독 윤가은)이 이 영화사의 창립작이었다. 상영 시간 104분, 15세 관람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