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버지 人生 자료 모으느라 30년 걸렸죠"

미국인 3명 중 1명은 이 회사에서 만든 옷을 입는다고 했다. 나이키·자라 등 유명 브랜드 40여 곳의 의류를 주문받아 생산하는 한세예스24홀딩스. 이 회사 김동녕(72) 회장을 7일 서울 여의도 본사에서 만났다. 작년 매출 2조2000억원에 국내외 직원 수만 3만7000명의 글로벌 기업. 하지만 이날 김 회장을 만난 이유는, 옷 때문이 아니라 아버지 책 때문이었다.

"아들에게 아버지가 특별한 건 누구에게나 당연하겠지만, 저는 선친에게 빚이 많았습니다. 젊었을 때는 부도를 내고 집안 재산도 많이 들어먹었죠. 하지만 끝까지 저를 믿어주셨어요. 이제 마음 빚을 조금이나마 갚은 것 같네요."

그의 부친은 한국 임상병리학 1세대이자 헌혈운동의 선구자로 불리는 학술원 회원 김기홍(1921~1986) 박사. 펴낸 책은 그가 기획하고 의학전문기자 출신 박두혁씨가 쓴 김 박사의 전기 '의당 김기홍'이다. 그는 국내 최대 인터넷 서점 예스24의 회장이기도 하다. 집안에서 책과의 인연은 김 회장만이 아니어서, 인터넷 서점 알라딘의 조유식(53) 대표가 그의 처조카다. 부친의 업적을 책으로 기리고 싶은 마음이야 많은 자식들의 소망이겠지만, '서점 주인 김 회장'의 소회는 조금 다르지 않을까. 그는 한참을 망설이다가, "오해 없이 들어주셨으면 좋겠다"며 말을 이었다.

"저희 젊었을 때 양서(良書)라고 하면, 대부분 외서 번역본이었습니다. 지금은 다르죠. 우리 작가와 학자들의 좋은 책이 쏟아집니다. 하지만 여전히 아쉬운 분야는 전기(傳記)인 것 같아요. 가족과 후손의 입장을 우선하다 보니 객관성이 부족한 경우가 많았죠."

어쩌면 부친 작고 후 30년이 지나서야 책을 낸 이유이기도 하다. 객관성에 대한 평가는 제3자의 몫이겠지만, 김 회장의 목표는 철저한 자료 수집을 통해 한국 의학사의 한 장(章)을 쓰는 것이었다고 했다. 동경제대 유학하고 서울대 의대 1회 졸업생이었던 부친은 대한임상병리학회 초대 회장을 지냈고, 한국 최초로 헌혈운동을 전개한 시민운동가이기도 했다. 하지만 책은 아버지의 업적보다 한국의학사에서 진단검사의학의 태동과 전개, 매혈에 의존했던 혈액 관리가 어떻게 시민들의 자발적 헌혈운동으로 전환됐는지에 더 많은 분량을 할애하고 있다.

회장실 한편에는 부친의 유품이라는 2단 나무 서랍장이 놓여 있었다. 손때 묻어 윤이 반질반질. 돌아가신 지 30년도 넘도록 간직하는 이유를 물었더니, 조용히 서랍을 연다. 육필로 이름과 주소를 적은 엽서 크기 카드 1000여 장이 빼곡하다. 첫 장에 연세대 김동길 명예교수의 이름이 적혀 있다. "연말이면 이 주소록을 확인해서 늘 연하장을 보내셨어요. 분량이 이 정도니 굉장한 작업이었죠. 아버님의 그 정성과 마음을 늘 잊지 않으려 합니다."

고개를 돌리니, 한쪽 벽면은 거대한 책장이다. 한 칸 한 칸이 농구공도 들어갈 만한 크기의 정사각형 구조인데, 특이한 건 책을 '세운' 칸과 책이 '누운' 칸으로 나뉘어 있다는 점. 30여 권씩 '누워' 있는 정사각형 칸을 세어보니 모두 24개다. 겸연쩍어하는 김 회장 대신 옆의 비서가 대답한다. "다 읽으신 책만 누울 권리가 있다"는 것. 1994년부터 2017년까지 '완독(完讀)'한 책들만 눕혀서 보관 중이라는 것이다. 보르헤스, 마르케스 등 유명 문인부터 김금희, 장강명, 천명관 등 당대의 국내 젊은 작가까지, 소설가들이 특히 많다. 김 회장은 "작년에 96세로 세상 떠나신 어머니도 마지막 순간까지 소설 읽기를 즐기셨다"면서 "젊었을 때는 제 꿈도 문화부 기자였다"고 했다. '문학청년 회장님'이 환하게 웃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