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 리뷰] "하찮은 日帝 따위… " 이렇게 통쾌한 독립운동가를 보았나

'왕의 남자'(2005)로 천만 감독이 됐다. 영조와 사도세자 이야기 '사도'(2014), 시인 윤동주와 영혼의 단짝 송몽규 이야기 '동주'(2015)에서는 인간의 내면을 읽었다. 오는 28일 개봉하는 영화 '박열'은 자신의 울타리를 또 한 번 확장하는 이준익(58) 감독의 새로운 시도를 보여준다.

영화는 일제강점기 도쿄 한복판에서 히로히토 왕세자 암살을 계획한 독립운동가 '박열'(이제훈)과 그의 동지이자 연인 '가네코 후미코'(최희서), 아나키스트 그룹 '불령사(不逞社)' 동료들의 이야기. 불령선인(不逞鮮人)은 당시 일제가 식민 통치에 반대하는 조선인을 비하한 용어이니, 그 자학적 유머를 확인할 수 있는 작명이다.

1923년 관동 대지진 뒤, 일제 내각은 폭발 직전의 민심을 무마하려 재일 조선인 학살을 유도하고, 박열을 왕세자 암살 미수범으로 몰아간다. "조선엔 영웅, 일본엔 원수로 적당한 놈"을 찾던 내무대신 '미즈노'(김인우)의 눈에 그가 손쉬운 먹잇감으로 비쳤던 것. 하지만 일제의 오판이었다. 스스로 경찰에 끌려간 박열은 자신을 찾아온 조선 기자에게 묻는다. "기자 양반, 이 재판이 조선에서 화제가 되게 해 줄 수 있겠소?" 사형 선고를 각오하고, 재판을 통해 소위 '신인(神人) 천황' 제도의 허위와 조선인 학살을 고발하는 '여론전'을 택한 것이다. 절차적 정당성을 가진 문명국을 자임했던 일제 법정은 "일본 제국주의가 유지되는 것은 신성함을 가장한 천황이 악마적 권력으로 민중에게 강요하기 때문 아니냐"고 공박하는 박열과 가네코의 발언을 막지 못한다. 일본 왕실과 내각을 조롱하고 조선인 학살을 폭로하는 발언들이 조선의 신문을 통해 보도되면서, 두 사람은 식민지 조선인들의 영웅이 된다.

이준익 감독은 "지금껏 일제강점기를 다룬 영화들에는 엄숙 진지해야 한다는 강박이 있었다. 독립군 활약상을 영웅시하거나, 식민지 백성의 억울함을 하소연하려는 경우가 많았다"고 했다. "반면 박열에게는 '일본 제국주의 따위 하찮은 것'이라는 호기가 있습니다. 그걸 목숨 걸고 실천하는 강단도 있었고요." 어찌 보면 박열은 영화 '동주'속 시인 윤동주의 '과격한 거울상' 같다. 끝없이 자신의 용기 없음을 반추했던 윤동주의 내적 갈망이 시(詩)로 승화됐다면, 박열은 스스로 죽음을 향해 걸어가는 실천을 선택해 종국에 역설적 승리를 쟁취한다. 이 감독은 "실존 인물을 통해 사람과 시대의 진실을 보여주고 싶었다"고 했다.

감정을 절제하는 카메라는 이 영화의 또 다른 미덕. 조선 소녀의 가슴을 죽창으로 꿰뚫고, 경찰서 안까지 쫓아와 조선인을 학살하는 대지진 당시 자경단의 만행을 여과 없이 비추는데도 분노나 슬픔으로 질척이지 않는다. 오히려 가장 절망적 상황에서도 툭툭 농담을 던지며 꿋꿋한 인물들을 통해 경쾌하고 해학적 분위기를 이어간다. 박열을 맡은 배우 이제훈(33)의 공이 크다. 자칫 과하게 표현하기 쉬운 역할임에도 넘치지 않고, '인간 박열'을 공감하게 만든다. 가네코 역의 배우 최희서(30) 역시 '투 톱'이라 해도 좋을 만큼 스크린 위 존재감이 충만하다.

아사히와 조선일보 등 한·일 양국의 신문 보도, 공판 기록과 자서전·평전 등을 통한 엄밀한 고증도 평가할 만하다. 이 감독은 "법정에 선 박열이 일제를 준엄히 꾸짖는 말들 모두 기록에 남은 그대로"라고 했다. 일본어 대사가 많은 영화지만, 재일 극단 '신주쿠 양산박'의 재일동포와 일본인 배우들이 대거 출연해 완성도를 높였다.

다만 당시 최강 제국 중 하나였던 일제 내각 대신들의 회의까지 희화화한 데 대해선 의견이 갈릴 것이다. 자칫 박열의 싸움이 가진 엄중함도 훼손될 수 있기 때문이다. 하고 싶은 이야기가 많기 때문이겠으나, 상영 시간 129분도 좀 길게 느껴질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