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베르디가 옆에서 커피 마신다 상상하며 만들죠"

"인생의 모든 건 '움직임'이에요. 가만히 앉아 있는 것도 일종의 움직임이죠. 공간에서 움직임을 만들어나가는 게 제가 천착하는 주제. 아마도 그건 움직임을 향한 저의 근본적인 사랑 때문일 겁니다." 서울 동대문디자인플라자(DDP)에서 세계 정상급 오페라 연출가 로버트 카슨(63)은 이렇게 말했다.

뉴욕 메트로폴리탄 오페라와 빈 국립오페라, 밀라노 라 스칼라 등 세계 최고 극장들을 누비며 다수의 오페라를 연출한 카슨은 대담한 노출과 곡예에 가까운 연기, 한 폭의 회화 같은 무대 디자인으로 손대는 작품마다 화제를 일으켰다. 2002년 파리 바스티유 극장의 오페라 '루살카'에서는 물의 요정 루살카가 사는 물속을 표현하기 위해 천장 가까운 곳에 침대와 조명을 데칼코마니처럼 대칭으로 매달고 바닥에 얕은 홈을 파서 물을 채웠다. 2015년 모스크바 볼쇼이 신(新)극장의 오페라 '리골레토'에서는 무희들이 브래지어를 벗어 바닥에 내던지고, 오페라 여주인공인 질다는 서커스 그네에 매달려 공중을 날아 관객들 혼을 쏙 뺐다. 죽은 딸을 부둥켜안은 리골레토 위로 거꾸로 매달린 곡예사가 회오리치듯 내려왔다 올라가는 피날레가 특히 압권이었다.

오페라 연출가이지만 뮤지컬 '마이 페어 레이디'와 '사랑은 비를 타고', 파리 그랑팔레의 '마리 앙투아네트' 전시 등도 다수 기획한 카슨은 8월 27일까지 DDP에서 열리는 루이비통의 전시 '비행하라, 항해하라, 여행하라'의 공간 배치를 맡아 또 한 번 재능을 발휘했다. 그는 "우리는 모두 인생이란 무대를 살고 있다. 전시도 인생"이라며 "연출가는 '아이즈 와이드 셧'! 눈을 한 번 감았다 떴을 때 주인공들이 관객과 함께 움직이는 듯한 느낌을 뽑아내는 게 중요하다"고 말했다.

1954년 캐나다 토론토에서 태어난 카슨은 "배우가 되는 게 꿈"이었다. 스무 살에 영국으로 건너가 브리스틀 올드 빅 시어터 학교에서 연기를 배웠다. 시간이 갈수록 연기보단 연출에서 두각을 나타냈다. "같은 학교에 다니엘 데이 루이스(아카데미 남우주연상을 세 차례 받은 영국 출신 명배우)가 다니고 있었어요. 꿈을 접어야 했죠(웃음). 다행히 어릴 때부터 오페라, 발레, 클래식 공연, 전시를 두루 섭렵해 모든 예술은 하나로 통한다는 생각이 확고했어요."

카슨은 "한 편의 고정된 그림 같은 나의 오페라, 한 편의 움직이는 연극 같은 나의 전시는 장르를 불문하고 보고 읽고 듣는 수많은 영화와 책, 그림에서 나온다"고 했다. "헨델이 18세기 런던에서 쓴 '리날도', 불의 테마가 등장하는 베르디의 '일 트로바토레'처럼 예술은 수백 년 전 사람들이 그들의 피와 살로 쌓아올린 역사예요. 몇백 년 전 이야기라 해도 지금 이 순간 진행되고 있는 것처럼 새로워야 하죠." 카슨이 밝힌 비결은 이랬다. "오페라를 연출할 때 옆방에 작곡가와 극작가가 커피를 마시며 담소를 나누고 있을 거라 상상해요. 그러면 마치 어제 일어난 일처럼 작품을 생생하게 그려낼 수 있죠."

카슨은 이번 루이비통 전시에 대해 "섹션별로 트렁크를 주제에 맞게 효과적으로 연결하는 데 주력했다"고 설명했다. 크루즈선을 타고 여행할 때 썼던 트렁크를 전시하는 공간에서는 벽면 가득 물결 치는 바다 사진을 붙이고 그 앞에 30도 정도 기울인 뱃머리를 놓아 관객들이 실제 항해하는 듯한 느낌을 살렸다. 1920년대 기차 객실을 재현한 공간에서는 당시 파리와 베네치아를 오갔던 오리엔탈 익스프레스의 카펫을 가져와 깔았다.

"낯선 도시에 가면 건물들의 색깔을 보고, 사람들을 둘러싼 냄새를 맡는 데 집중한다"고 그는 말했다. "생수 한 병을 놓더라도 어떻게 하면 보기 좋을까 고민하는 과정에서 감각이 벼려집니다. 나는 보는 사람들을 지루하게 만드는 사람이 되긴 싫어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