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펑퍼짐한 장독처럼… 사람 사는 풍경 푸근하게 빚어요"

마흔셋 이환권은 순한 남자다. 악의라곤 없는 눈매, 느릿느릿 어눌한 말씨가 그렇다. 두 손이 빚어내는 조각들도 주인을 닮았다. 출근길 정류장에서 버스를 기다리는 남자, 빨래 널다 말고 맑게 갠 하늘을 바라보는 여인, 공부하기 싫어 책상에 엎드린 채 공상에 잠긴 소녀…. 한 줌 햇살, 한 줌 행복에도 깔깔 웃는 사람들이 그의 손끝에서 태어난다. "'어? 나랑 비슷하네' '우리 사는 풍경이네' 하며 흐뭇하게 웃어주실 때 제일 기쁘죠."

올해 김세중조각상 청년조각상을 받았다. 최우람·양혜규·이완 등이 거쳐 간 상이다. 늦은 감 있지만 현대미술에서 "한물갔다" 여기는 구상 조각으로 인정받은 상이라 각별하다. 마침 서울 신사동 '예화랑'에서 7월 15일까지 초기작부터 최근작까지 아우르는 '예기치 않은 만남'전이 열린다. "지적이고, 그래서 이해하기 어려운 작품이 훌륭하다고 여기는 것이 현대미술의 맹점이라고 생각해요. 저는 '공감'이야말로 예술의 가장 중요한 코드가 돼야 한다고 믿거든요."

대학(경원대) 시절부터 두각을 나타냈다. 3학년이던 1999년 한국구상조각대전에서 2등상을 거머쥐면서다. 트레이드 마크인 '납작 조각'이 이때 시작됐다. "영화를 TV로 보면 스크린 비율이 맞지 않아 좌우가 줄거나 위아래가 잘린 채 나오잖아요. 몸이 옆으로 늘어나기도 하고 길쭉해지기도 하고요. 이걸 3D 입체로 만들면 재미있겠다 생각했어요. 착시 현상도 일어나고요."

첫 개인전 '버스정류장'은 서울 세종문화회관 야외에서 열렸다. 아이스크림을 든 채 버스를 기다리는 여대생, 주간지를 읽는 대머리 아저씨, 술에 취해 웅크린 노숙자 등 저마다 '기다림'을 안고 정류장에 선 풍경이 시민들 발길을 사로잡은 전시다.

제작비를 마련하려고 에버랜드에서 스티로폼으로 눈사람 만드는 '알바'를 뛰어야 했지만, 개인전은 꾸준히 이어갔다. '바람 부는 날'에 이어 2008년 서울 정동문화회관에서 연 '장독대' 전시는 이환권이란 이름을 대중에게 처음 알렸다. 가족의 모습을 옹기종기 모여 앉은 장독들에 은유한 작품으로 지금도 덕수궁 길 끝자락에 설치돼 시민들 사랑을 받는다. "짜부라진 조각상이다 보니 쭈그려 앉아 밑에서부터 올려다보는 관람객들 많지요. 외국인들도 좋아하고요."

무명 작가의 가능성을 먼저 알아본 건 아트페어였다. 한국화랑협회가 주최하는 키아프에 이어 2006년 홍콩 크리스티 경매에 내놓은 조각상 두 점이 추정가의 10배 금액에 낙찰되면서 억대를 호가하는 스타 작가가 됐다. 해외에서도 작품 요청이 들어온다. 최근엔 싱가포르 샹그릴라호텔에 '장독대' 신작을 설치했다. '물놀이하는 싱가포르 여섯 명의 아이들'이다.

요즘엔 탈북자, 다문화 가족의 삶에 관심이 많다. '삼남매'가 대표적이다. "원양어선 엔지니어였던 한국 남자가 아프리카 가나의 여인과 사랑에 빠졌어요. 그 사이 태어나 씩씩하게 커가고 있는 3남매지요. 내 마음속 나도 모르게 꿈틀대는 편견, 차별을 없애고 싶어서 열심히 작업하는 중입니다."

평론가 김종길은 이번 전시에서 주목해야 할 작품은 '물웅덩이(A Puddle)' 연작이라고 했다. 웅덩이에 비친 자신의 그림자를 형상화한 또 다른 실험. 영국의 극사실주의 조각가 론 뮤익처럼 세계적인 작가가 되고 싶으냐는 물음에 이환권이 답했다. "들뢰즈의 책에 '천 개의 고원'이 있지요. 각자의 고원에서 최고의 경지에 오르면 되는 거 아닐까요?(웃음)" (02)542-554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