현대사 60년 견뎌낸 家屋, 학교 품으로

"어린 시절 추억이 담긴 고향 같은 집입니다. 이제는 학내 구성원 모두 언제든 찾을 수 있는 공간이 되길 바랍니다."

경희대 설립자 고 조영식(1921~2012) 박사의 가옥이 학교 품에 안겼다. 고인의 아들인 조인원(63) 경희대 총장 등 유족은 60여 년간 살아온 서울 종로구 명륜동 가옥과 부지를 최근 학교법인 경희학원에 기부했다고 4일 밝혔다. 사학(私學) 설립자 측이 학교법인에 자신의 재산을 기부하는 것은 이례적이다.

조 박사는 1951년 교육자의 길에 들어섰다. 당시 국회에서 함께 활동하며 인연을 맺은 초대 부통령 이시영 선생이 "신흥초급대학을 인수해달라"고 제안해 받아들인 것이다. 신흥무관학교의 후신인 신흥초급대학은 당시 6·25 전쟁으로 재정난에 시달리고 있었다. 조 박사는 1952년 부산에 신흥초급대학 건물을 세우고 대학 설립 인가를 받았으나, 이듬해 화재로 건물은 잿더미가 됐다.

조 박사는 포기하지 않고 1953년 서울로 올라와 새로운 터를 찾아나섰다. 현재 경희대가 있는 서울 동대문구 회기동 부지를 확보했다. 공사 비용은 대부분 빚으로 충당했다. 막바지 공사가 진행 중이던 1955년엔 조금이나마 빚을 갚으려고 당시 살던 혜화동 집을 팔았다. 그때 이사한 곳이 폐가(廢家)에 가깝던 명륜동 저택이다. 이사 후에도 집 앞에는 빚을 독촉하는 채권자들이 계속 몰려왔다. 조 박사의 부인 고 오정명(1921~2008) 여사는 "돈을 구하러 동분서주했던 기억이 선하다"고 회고록에 썼다. 같은 해 대학 설립 인가가 떨어졌고 5년 뒤 '경희대학교'로 이름을 바꿨다. 오늘날 경희대 서울캠퍼스의 시작이다.

명륜동 가옥은 업무 공간이 부족했던 학교 설립 초기에 집무실이자 회의실, 만찬장 역할을 했다. 교수와 학생 간 면담도, 서울 시내 대학 총장 만찬도 이곳에서 열렸다. 학생운동으로 학내(學內) 갈등이 거셌던 1970~80년대에는 '막후 협상 테이블' 역할도 했다. 조 총장은 "아버지께선 늘 집의 문턱이 낮기를 바라셨다"며 "덕분에 어린 시절부터 어려운 친척들이나 교직원들이 이곳에서 머물곤 했다"고 말했다.

명륜동 가옥은 한국 현대사의 현장이기도 했다. 1961년 5·16 직후에는 군정(軍政) 관계자들이 찾아와 "(관변 단체인) 오월동지회 회장을 맡아달라"고 요구했다. 이를 거부하자 문교부는 대학 총장 승인을 취소했다. 열흘 뒤 문교부 장관이 찾아와 "지금은 어쩔 수 없다. 곧 복귀시켜 주겠다"고 했다고 한다. 1982년에는 조 박사가 주도한 천만이산가족 재회추진위원회의 '컨트롤 타워' 역할을 했다. 이 운동은 세계기네스협회가 인증한 '최다(最多) 서명' 기록을 가지고 있다.

조 총장은 "아버지와 어머니 모두 이북 출신이라 유족들에겐 명륜동 집이 고향처럼 느껴져 고민을 많이 했지만, 늘 자신보다 학교를 우선했던 아버지 뜻을 받들기로 했다"고 말했다. 명륜동 가옥은 지하 1층, 지상 2층으로 650㎡ 규모이고, 부지는 약 930㎡이다. 공시지가 기준 50억원대로 평가받는다. 공영일 경희학원 이사장은 "경희의 역사가 담긴 저택을 기증해주셔서 감사하다"며 "평생 대학 발전에 헌신한 설립자의 뜻을 기리는 공간이 되도록 하겠다"고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