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 리뷰] 지하 1100m 지옥 탄광, 그들의 분노도 부글부글 끓었다

"우리 하시마(端島) 광업소는 너희 조선인들을 과소평가하지 않는다."

지옥으로 가는 길은 종종 선의(善意)로 위장되어 있다. 1940~1945년 수많은 조선인이 강제 징용을 당했던 일본 나가사키 남서쪽의 섬 하시마. 일본의 해상 군함을 닮았다고 '군함도'라고 불리는 이 섬의 일본인 탄광소장은 조선인 강제 징용자들을 이렇게 치켜세우는 척한다. 26일 개봉하는 영화 '군함도'(감독 류승완)의 첫 장면이다. 사실인즉슨 등골이 휠 때까지 노동력을 착취하겠다는 다짐일 것이다.

영화 '군함도'는 곧바로 에두르지 않고 관객들을 지하 1100m의 탄광으로 끌고 내려간다. 45도 이상의 열기 때문에 부글부글 끓는 증기가 사방에서 뿜어져 나오고, 가스 폭발 사고의 위험에 노출된 영화 속 갱도를 카메라를 따라서 들어가다 보면, 왜 갱도의 막다른 곳을 '막장'이라고 부르는지 자연스럽게 이해하게 된다.

일본의 근대화와 군국주의가 조선인에 대한 악랄한 착취와 수탈에 기반하고 있다는 걸 인상적으로 보여주는 장면이다. 영화는 지상의 공간은 화려한 컬러 화면으로, 지하 갱도는 숨 막히는 흑백 영상으로 표현한다. 일제의 지상(地上)과 조선 징용자의 지하는 이렇듯 색상으로 양분된다. 그래서 영화는 제작사(외유내강)와 제공 배급사(CJ엔터테인먼트)의 로고를 보여주는 첫 장면부터 흑백 화면으로 시작한다.

선악(善惡)으로 손쉽게 구분되지 않는 입체적 인물상도 영화의 매력이다. 종로를 주름잡던 깡패였지만 군함도로 끌려온 뒤에는 조선인 징용자를 맘대로 부릴 수 있는 노무(勞務) 담당 자리를 꿈꾸는 '최칠성'(소지섭), 탄광소장의 비위를 맞추려고 애쓰는 클라리넷 연주자 '강옥'(황정민)…. 등장인물들은 누구도 친일(親日)과 반일의 범주로 정확하게 양분되지 않는다. 류승완 감독은 19일 시사회 직후 간담회에서 "당시 증언과 자료를 보면 '나쁜 일본인'과 '착한 조선인'만 존재하는 건 아니었다"면서 "손쉬운 이분법으로 진영을 나눠서 관객을 자극하거나 사실을 왜곡하는 건 좋은 모양새가 아니라고 생각했다"고 말했다.

하지만 영화의 미덕은 132분 상영 시간의 중간 반환점을 돌면서 급속하게 퇴색한다. 군함도에서 지옥 같은 강제 징용에 시달리던 조선인들이 탈출을 꿈꾸는 중반부터 영화는 시대극의 경계를 넘어서 낭만적인 판타지로 균형을 잃고 급격하게 기울기 시작한다. 조선인 징용자들이 '화염병'을 만들어 일본군에게 투척하는 장면이나 '최칠성'을 따르는 조선인들이 장총을 들고 일본군에게 조준 사격을 하는 대목은 시대극보다는 차라리 서부극을 연상시킨다. 군함도로 잠입한 뒤 조선인들의 탈출을 진두지휘하는 광복군 소속 OSS(미 전략 정보국) 요원 '박무영'(송중기)의 활약상을 보고 있으면 '수퍼 히어로가 아우슈비츠 수용소에 들어가서 나치 병사들과 싸우는 활극'을 보는 듯한 착각이 들기도 한다.

2015년 '베테랑'(1341만 관객)과 2013년 '베를린'(716만명)의 흥행 감독인 류승완에게 화려한 볼거리나 액션을 포기하라고 주문할 수는 없는 노릇이다. 다만 문제는 감독 스스로 작품성과 대중성, 역사성과 상상력의 갈림길에서 어느 한 쪽도 포기하지 않고서 계속 제자리를 맴돌고 있다는 점이다.

'군함도'는 나치 관료들을 영화관에 몰아넣고 폭파시키는 '바스터즈: 거친 녀석들' 같은 통쾌한 복수극에 가까울까. 아니면 아우슈비츠에서 나치 병사들에게 협조할 수밖에 없는 유대인 수감자의 비극적 운명을 묘사한 '사울의 아들' 같은 진지한 드라마를 닮았을까. 영화는 끝까지 속 시원하게 결정을 내리지 못한다. 류 감독은 이날 간담회에서 "'군함도' 탈출은 정리되지 않은 과거사에서 탈출하는 것과도 같다. 현대사에서 청산됐어야 하는 문제들이 유령처럼 떠돌아서 현재와 미래를 잡아먹고 있다"고 말했다. 하지만 영화의 완성도를 잡아먹은 건 어쩌면 감독 자신일지도 모른다는 아쉬움이 남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