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구를 두고 인류와 싸운 라이벌은 90만종의 곤충

곤충의 통찰력

길버트 월드바우어 지음｜김홍옥 옮김｜에코리브르｜396쪽｜2만원

"블루베리파이 하나 주세요." 식당 점원이 답한다. "손님, 이건 블루베리파이가 아니라 애플파인데요." 수많은 파리가 파이에 잔뜩 달라붙어 있어 생긴 착각이었다. 20세기 초반 미국 몬태나주에서 실제로 있었던 일. 말과 마차가 주요 운송 수단이었던 미 대륙은 집파리 떼로 골머리를 앓았다. 말 한 마리는 매일 11~22㎏ 똥을 쌌고, 말똥에서 파리는 맹렬히 번식했다. 인류의 반격은 의외의 장소에서 시작됐다. 헨리 포드가 보급형 자동차 모델 T를 대량생산하면서 자동차가 말을 대체했다. 말똥이 사라졌다.

이어 살충제 DDT가 1945년 미 전역에 보급되면서 파리 숫자는 급감했다. DDT를 한번 뿌리면 효과는 6개월 넘게 갔다. 파리는 DDT를 뿌린 벽에 잠시 앉기만 해도 중독돼 죽었다. 그러나 파리는 사라지지 않았다. DDT에 내성을 가진 소수의 파리가 '대세'가 됐다. DDT를 살포하기 시작한 지 6년이 지나자 파리 한 마리를 죽이는 데 필요한 DDT 용량은 700배로 늘어났다. 인간과 곤충의 도전과 응전의 한 장면이다.

길버트 월드바우어(89) 일리노이대 명예교수(곤충학과)는 "인류가 이 자그마한 생명체, '곤충'을 상대로는 단 한 번도 제대로 된 우위를 점한 적이 없다"고 썼다. 그는 '욕망의 곤충학' 같은 대중적인 곤충 관련 저작을 썼던 곤충학자이다. 인류가 희귀 동물을 잡아 죽이고 기후변화를 가져오면서 '여섯 번째 대멸종'이 일어나고 있다는 지적도 나오지만, 곤충의 세계에서는 꼭 그렇지만은 않다. 책은 20종의 해충을 사례로 든다. 지구 120만종 생물 중 90만종이 곤충이고, 이들은 인류와 함께 생존하는 법을 끊임없이 터득하고 있다. 이 책은 인류에게 맞서는 곤충의 진화와 곤충을 활용해 과학을 발달시킨 인류의 진화를 함께 보여준다.

옥수수근충의 사례를 보자. 미국 농부들은 옥수수와 대두를 매년 번갈아 심는 윤작(輪作)으로 옥수수 뿌리를 파먹는 옥수수근충을 100년 가까운 시간 동안 제압해 왔다. 이 벌레는 알 상태로 겨울을 나고 이듬해 봄에 부화해 옥수수 뿌리를 파먹는다. 반면 대두 뿌리는 먹지 않기 때문에 옥수수밭인 줄 알고 부화한 벌레들은 대두 뿌리 사이에서 굶어 죽었다. 그런데 1998년쯤 옥수수근충이 다시 병충해를 입히기 시작했다. 벌레들은 두 가지 생존법을 찾았다. ①땅속에서 1년 이상 알 상태로 있으면서 다시 옥수수를 심을 때까지 기다린다. ②이듬해 옥수수를 심을 확률이 높은 대두밭에 알을 까기 시작했다. 벌레들이 적응하면서 윤작은 효과를 잃었다. 저자는 "작물 윤작은 인간의 뜻이었던 만큼 자연선택이 아니라 '인위'선택이라 할 수도 있겠지만, 진화가 이뤄지고 있다는 사실만큼은 변하지 않는다"고 했다.

물론 인간도 반격에 성공한다. 밀 수액을 빨아먹는 밀혹파리 번식을 손쉽게 막아낸다. 살충제나 유전공학에 의지하지 않는 간단한 해결책. 밀혹파리 성체가 사는 기간은 고작 사흘. 이때 밀 그루터기에 알을 낳지 못하면 번식 기회는 사라진다. 밀혹파리 성체가 죽을 때까지 기다리고 나서 파종해 문제를 해결한다.

저자는 배추흰나비 유충과 이들이 먹는 식물을 이야기하며 공진화(共進化) 개념을 설명한다. 배추흰나비는 양배추와 케일 같은 겨잣과 식물 이파리만 먹는다. 겨잣과 식물은 유충이 자신을 피하도록 특수 물질을 만들어내고 유충은 다시 그 특수 물질을 극복할 수 있도록 진화한다. 맞수의 대결을 보는 것 같은 인간과 곤충의 대응 전략을 보면 공진화가 여기서도 일어나는 것 같다는 생각을 하게 된다.

10일 만에 다음 세대를 만들어내는 초파리 대신 멘델처럼 1년 동안 콩 한 세대를 관찰해야 했다면 어땠을까. 저자는 유전학이 지금 수준에 이르기 어려웠을 것이라고 지적한다. 유전학 발전에도 해충이 기여했다는 말이다.

90만종이 넘는 곤충 중 해충은 2%에 불과하다. 그렇지만 저자는 모기, 집파리, 진딧물, 배추흰나비, 밀혹파리 같은 해충 위주로 이야기를 풀어나간다. 월드바우어는 "인류가 무해하다 싶은 곤충보다 인간에게 경제적 피해를 주는 해충을 집중적으로 연구했기 때문"이라며 "다행히 해충에 관해 알아낸 사실은 다른 모든 곤충에 적용될 뿐 아니라 인간 역시 함께 살고 있는 지구 생태계에 관한 깨달음을 준다"고 썼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