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상한 정열'의 비 오는 날 쌀국수

'비 오는 날이면 쌀국수'라고 생각하는 사람이 되어 있다. 정신을 차려보니 그렇다. 특히 비가 퍼부으면 더 그렇다. 쌀국수를 앞에 놓고 앉아 고수와 민트와 매운 고추를 흩뿌리고 레몬을 쥐어짜고 싶다는 충동! 왜 그럴까 생각해봤는데, 이유는 없다. 그냥 끌리는 것이다. 비 오는 날이면 파전이나 장떡 혹은 감자탕이나 수제비를 먹어야 한다고 주장하는 사람이 그런 것처럼.

그런 내가 '비'와 '쌀국수'가 동반으로 등장하는 소설에 혹하지 않을 수 없었다. 기준영의 단편소설 모음집인 '이상한 정열'에 실린 '여행자들'이다. '쌀국수와 맥주를 시켜놓고, 냅킨으로 젖은 가방과 팔뚝, 목덜미를 닦으며 창밖을 바라봤다. 그러다 보니 맥주가 나왔고, 반 병쯤 비우고 나니 쌀국수가 나왔다.' 단순한 듯하지만 단순하지 않다. 나는 이 부분을 읽다가 이 작가가 쌀국수를 이용해 분위기를 만드는 방식에 감탄했다.

내가 '빗속의 쌀국수'에 매혹되는 이유도 깨달았다. 첫째, 맥주를 먼저 먹을 수 있기에. 나는 쌀국수를 먹을 때면 '현지 음식엔 현지 술이지!'라며 베트남 맥주 바바바(333)나 싱가포르 맥주인 타이거를 시켜 왔던 것이다. 없으면 클라우드나 생맥주라도 기꺼워하며. 둘째, 젖은 몸을 대충 닦고 먹기에 이보다 잘 어울리는 음식은 없기에. 냅킨으로 몸을 닦고 뜨거운 쌀국수 국물을 들이켜면 참으로 기분이 촉촉해지는 것이다. 셋째, 이게 핵심이 아닐까 싶은데, 들뜬 기분을 느끼게 해줘서 그런 게 아닌가 싶다. 그러니까 잠깐 동안 여행을 하는 기분. 여행자가 되는 기분.

여행자일 때의 내가 가장 맛있게 먹었던 음식 중 하나는 쌀국수였고, 그때 먹었던 쌀국수들은 내 인생의 쌀국수로 남아 있다. 서울에서 쌀국수를 먹으면서 그때, 그곳, 그 사람, 그 냄새와 당시의 나를 떠올리는 것이다. 더우면 더운 대로 추우면 추운 대로, 기쁘면 기쁜 대로 외로우면 외로운 대로, 있는 그대로의 나를 편안하게 해주던 쌀국수와. '여행자들'을 읽다 보면 '비+쌀국수+여행'의 삼단 콤보가 주는 훈기가 포글포글 피어올라 나를 육박하는 걸 느낀다. 귓가로는 계속해서 빗소리가 들리고. 마지막 문장이 압권이다.

'만나고 스쳤던 여자들, 그리고 아직 사귀어보지 못한 다른 여자들을 다 사랑하고 그리워할 수 있을 것만 같던 5월의 금요일이었다.' 오늘도 금요일인 것이다. 그리고 빗속이다. 그리고 나는 아직 사랑하지 못한 사람과 먹지 못한 음식과 읽지 못한 책을 그리워하는 것이다.